안녕하세요~ 시간여행자에요!


이번시간에는 대만의 초대 총통인 장제스라는 인물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해요!


지난시간에 본성인, 외성인 등을 설명하면서 청나라가 대만이라는 섬을 실효지배했다고 배웠어요. 이번장에서는 대만의 초대 총통인 장제스라는 인물이 어떻게 등장했는지 알아보려고해요.


사실 청나라가 멸망하고 오늘날의 중국으로 넘어가기까지 굉장히 많은 사건이 있었는데요, 그 과정은 홍콩편 '쑨원은 누구인가?'에서 언급하려고합니다. 그러니 여기에서는 시간적 흐름만 설명만 하도록 할께요!


'1894 청일전쟁' -> 청나라 패 -> 청나라 학생 중 하나인 쑨원이 국가의 무능함에 분개 -> 황제가 아닌 백성을 위한 나라를 만들고자 함 -> 삼민주의(민족, 민권, 민생)를 앞세워 혁명을 일으킴 ->  1912년 신해혁명을 통해 청나라 몰락시키고 '중화민국(대만)'을 수립 -> 국민당 창당 -> 쑨원은 소련의 도움을 받은 공산당 세력 (모택동)을 포섭 -> 1925년 쑨원 사망 -> 장제스가 국민당 대표가 됨'


장제스에 대한 좋은 영상이 있어서 유튜브링크를 걸어 놓을께요. 한 번 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아요!



당시 청나라가 몰락하고 쑨원이 곧바로 모든 청나라의 영토를 지배한 것은 아니었어요. 군벌세력들이라고 해서 여러 세력들이 존재했는데 장제스는 모택동과 함께 1차 국공합작을 통해 이러한 세력들을 진압해 나갔어요.


하지만 진압하는 과정에서 모택동의 공산당원들이 희생을 당하자 더이상 합작을 진행하지 않았는데요. 장제스는 민주주의 이념에 반하는 공산당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1927.4.12 상하이에서 공산당을 진압하기 시작했어요. 이것이 바로 국공내전이에요. 


하지만 일본의 제국주의가 거세지기 시작하면서 다시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지기 시작해요. 1943년 미국(루즈벨트), 영국(처칠), 중화민국(장제스)은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 모여 5일간 회담을 갖게 되는데요. 여기서 한반도의 독립이 비공식적으로 논의 되었다고 해요. 비공식회담이라 공식적인 문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장제스는 한반도의 독립을 주장했다고 해요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지만요). 아무튼 장제스가 윤봉길 의사에게 감동받아 상해임시정부를 도와주었던 점도 있었고 대한민국에게는 많은 도움을 주려했던것 같아요. 이와 관련한 자세한 부분은 상해 여행에서 다룰께요~


1945년 미국의 히로시마 원폭으로 일제가 항복하자 1946~1949년 제2차 국공내전이 발생하게되요. 처음에는 장제스의 중화민국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지만 점점 모택동의 중국 공산당에게 밀려나게 되고 지금의 대만섬으로 피신했다고 해요.


장제스가 일본에게 대항할 때, 당시 자신들의 역사가 담긴 신석기 때부터 청나라까지의 문화재들을 지키기 위해 가장 귀중한 69만 여점을 선별해 각종 지역에 숨겨두었는데,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에게 밀리면서 대만으로 이주할때 모든 문화재들과 군인 200만을 데리고 갔다고 해요


이때 옮겨진 문화재들이 현재 타이페이 부근의 고궁박물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박물관은 동양의 역사와 문화재를 대표한다는 측면에서 세계 4대 박물관 중 하나로 뽑히고 있는데, 사실 신석기때부터 청나라때까지 가장 유명한 문화재를 보려면 현재 북경이 아닌 대만의 타이페이로 가야한 다고 합니다!


중화민국은 섬으로 피신하고 중국공산당이 모든 영토를 지배하게 되자, 결국 중국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오늘날 중국)으로 바뀌게 되고, 1970년대 UN에서도 중화인민공화국의 압력에 밀려나게되요. 상임이사국 자격을 박탈당하죠. 그 이후로는 여러나라들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압력에 못이겨 단교를 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요. 결국 1992년 대한민국과도 단교를 하게됩니다.



이번장에서는 장제스에 대해서 알아봤는데요. 그 과정에서 언급된 "고궁박물관"과 장제스를 기념하는 "중정기념관"을 방문했기에 관련 후기를 쓰려고해요~



<1.고궁박물관>


아래가 고궁박물관이에요. 박물관안에는 굉장히 많은 유물이 있는데, 실제로는 모든 문화재를 전시를 하지 않는다고 해요 (워낙 수가 많으니까요;;ㅎㅎ). 고궁박물관 뒤에 있는 3000M 넘는 고봉 200개에 보물을 숨겨놓고 3개월마다 교체하는데, 모든 유물을 다 보려면 30년이 걸린다고 하고, 주요 전시물들을 제외한 것들은 3~6개월 마다 교체한다고 해요!





사진촬영이 허용된 문화재중에 대표적인 '취옥백채'만 사진으로 남겼었어요. 취옥백체의 정보는 아래와 같아요.

사용용도: 청나라 11대 광서제의 왕비인 서비의 혼수품

줄기의 하얀색 부분: 순결을 의미

초록 잎: 미와 젊음을 의미

한쌍의 메뚜기: 다산의 의미



공식적으로 확인 된 바 없으나 중국이 대만의 UN 가입 조건으로 비밀리에 제안한 것이 바로 취옥백채를 들려주는 것이었다고 해요. "만약" 사실이라면 이 제안을 대만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였으니 이 옥배추가 지닌 무한한 예술적 가치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외 여러 문화재들을 감상할 수 있어요. 그리고 정말 오래된 문화재이지만 정말 독특하고 세련된것들이 많았어요. 오늘날에는 모든 것을 기계로 만들지만 저 당시에는 저런것들을 모두 손으로 많들었던것을 생각해보면 과거의 사람들이 현대인보다 손재주는 훨씬 뛰어났을것 같다는 생각을했어요.



<2.중정기념관>


1975년 장제스 사망을 기리기 위해 중화민국 행정원이 기념당의 건설을 결정하였고해요. 




본당 건물의 높이가 70m. 본관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모두 89개인데, 이는 장제스가 사망한 나이 89세를 의미한다고 해요. 제가 방문했을 때는 보수공사중이었어요. 



해당 부지는 본래 육군본부 및 헌병사령부로 쓰였던 곳이고, 미국의 링컨 기념관을 본따 만들어졌다고해요




중정기념당의 경비병들은 모두 현역 군 의장대로 구성되는데, 10~17시 사이에 매시 정각마다 교대를 한다고해요. 건물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이 서북쪽 방향인데 이것이 중국본토 방향이라고해요. (본토의 수복의지를 표현한걸까요?) 당시 방문했을 때 교대식을 영상으로찍었는데 용량크기 때문에 편집을해야할 것 같네요 ㅎㅎ 시간있을 때 금방해서 올릴께요!



중국의 전통적 건축양식의 하나로, 패방(엄밀하게는 패루)이라는 문이 있는데 중국에서는 지금도 사적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나 시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를 조성할 때 패방을 세운다고해요. 


"본래 건립 당시에는 大中至正(대중지정)'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민진당 시대에 이걸 '自由廣場(자유광장)'이라고 바꿔 버렸다. 대중지정(大中至正)'이라는 의미는 치우침 없이 공정하다는 의미로 장개석의 호인 중정과 관련이 있었는데, 마잉주(馬英九) 총통어 전임자인 야당 민진당의 천수이볜 전 총통이 집권한 후, 민진당은 국민당의 흔적 지우기 일환으로 대중지정이란 글자를 지우고 자유광장으로 바꾸었습니다. 중정기념당의 이름도 대만민주기념관으로 바뀌었다가, 후에 다시 중정기념당으로 환원되는 일도 있었죠." 인용사이트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ek0705&logNo=221672269799&categoryNo=7&parentCategoryNo=0


그런데 문구를 바꾸는것만으로도 엄청난 세금이 투입된다고해요. 그래서 더이상 문구를 바꾸지 않고 그냥 두었다고합니다.



현재 대만에는 국민당과 민진당이 주요 정당인데, 아이러니하게 국민당은 중국과 우호적일 것을 주장하고 있고, 민진당은 대만의 강력한 독립을 주장하고 있어요. 차이잉원 현 총통은 이러한 기념당이 권위주의 숭배라며 기념품 판매를 금지시키고, 매년 2.28일 폐관을 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대만 국민은 대만의 독립을 강력하게 지지하지만, 랜드마크가 되어버린 중정기념관을 비판하는 민진당에 대한 입장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이 지배적이라고 해요. 






중국분들이 이 글을 보면 싫어하실 수 있겠지만, 대한민국 사람입장에서는 임시정부를 도와주었던 장제스가 무력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공산당을 흡수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해요. 장제스가 쑨원만큼 했다면, 장제스가 오늘날 중국을 통일했다면, 오늘날 중국이 민주주의 국가였다면 우리나라가 분단되는 일이 있었을까요?


여행내내 대만이라는 곳을 둘러보면서 이러한 생각들이 항상 맴돌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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