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번글에서는 3.1 운동이 일어나 후 조직적인 독립운동이 일어나는 문화통치 시기에 대해서 알아볼거에요. 상해임시정부에 대한 내용은 굉장히 많기 때문에 우선 여기에서는 문화통치 시기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과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에 대해서 소개해드릴까해요!



<1. 문화통치>



1) 일본내의 민주주의 운동


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은 전쟁터가 되었지만 미국과 일본은 직간접적으로 전쟁물자를 판매함으로써 점점 자국내의 경제성장률이 커지게 됩니다. 이렇게 자본주의가 발전하자 시민계급이 등장하게되요.  


일본은 당시 민주주의 국가라기 보다는 중앙집권적 군국주의 성향이 매우 강했는데요.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여 공산주의 정권이 세워지자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공산주의 진영을 저지하고자 1918.07.12일 시베리아 출병을 결정했어요 (그런데 사실 자유민주주의 진영으로써 공산주의 막고자했던거 보다는 미국을 도와주고 자신들이 아시아세력으로 나가기 위함이었던거 같아요).


전쟁을 위해서는 쌀이 필요했는데 일본 도야마 현에서는 쌀 도매상들이 쌀을 매점하여 값을 폭등시키자 주민들과 충돌이 일어나게되요. 언론이 이를 보도하려했지만 정부에서 이를 막았고, 예전과는 다른 힘을 갖고 있던 일본자국내 시민계급이 압력을 넣었어요. 그러자 1918.09.21 데라우치 내각이 사퇴하고 하라 다카시가 내각을 조직하게 됩니다.



2) 문화통치의 시작


대한제국에서 3.1운동이 발발하자 조선총독부는 무력운동으로는 대한제국을 제압하는건 무리라고 판단했어요. 또한 일본내 민주주의 운동과 세계2차대전 이후 민족자결주의가 선언되면서 조선총독부는 무력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방향을 바꾸게됩니다.


조선총독부는 대한제국의 언론의 자유, 교육의 자유 등을 부여했어요. 하지만 이 역시 일본의 입맛에 맞는 인사들을 배치함으로써 사실상 자신들의 문화적 요소들을 대한제국에 심어놓으려고 했습니다.


또한 당시 총, 칼을 차고다니면서 위협했던 헌병 경찰제에서 보통 경찰제로 바꾸었지만 경찰 수와 장비는 더욱 강화되어 민족주의 운동을 이전보다 더 심하게 탄압하게 됩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급격한 공업화로 인해 식량부족 문제에 시달렸었는데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대한제국의 쌀 생산량을 증가시키는 산미증식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조달하게되죠. 일본은 대한제국내의 반발을 걱정하여 실제 땅 주인인 지주들에게는 큰 피해가 안가도록 하고, 소작 농민들에게 쌀 생산을 증가시키는데 들어가는 비용을 모두 전가하게 됩니다. 이렇게 식민지 지주제가 심화되어갔죠.


일본은 자신들이 아시아까지 세력을 펼치려면 한반도가 지리적으로 중요했기 때문에 한반도 역시 공업화를 하기위해 여러 준비들을 합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한반도내의 경공업 중소 자본의 투자와 일본 대자본이 들어오게 됩니다.







<2. 의열단>


비폭력 운동인 3.1 운동이 실패하자 독립을 위한 길은 무력항쟁뿐이다라고 주장하는 세력들이 모이게 됩니다. 그리고 약산 김원봉을 단장으로 하는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이 1919.11.09에 설립되게 됩니다.



의열단은 문화통치 시기에 활동한 대표적인 단체인데요. 그들의 활동이력은 아래와 같습니다.


1920 9 14: 박재혁이 부산 경찰서에 들어가 경찰서장을 폭사시켰다.

1920 12 27: 최수봉이 밀양경찰서 소속 모든 경찰이 모인 가운데 폭탄을 투척하였다.

1921 9 12: 김익상이 조선총독부 청사에 들어가 폭탄을 던졌다. 폭발로 청사 일부가 부서졌다.

1922 3 28: 김익상, 이종암, 오성륜이 상해 황포탄 부두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려다 체포되었다. 오성륜 의사는 가까스로 탈옥하고, 김익상 의사는 1943년 처형되었다.

1923 1 12: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1924 1 5: 김지섭이 도쿄의 궁성 정문 앞 이중교에서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하였다.

1924 6 1: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이 친일파 정갑주와 가족을 사살하였다.

1924 6: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이 이토 히로부미 수양녀이자 독립운동가들의 정보를 일본경찰에 넘기던 밀정, 배정자에 대한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함(배정자가 은퇴하게 된 사건임), 친일파 조직인 일진회 이용구 회장 암살 시도중 부상만 입힌 채 실패함

1924 6 7: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이 봉천성 일본 총영사관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불발로 실패, 대서관, 금정관에서 군자금 탈취하다 현장에서 김광추는 총에 맞아 순국, 김병현과 박희광은 체포되었다.

1926 12 28: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습격하였다.



1-2) 상해 황푸강


김원봉은 1922.03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가 상해에 온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어요. 1922.03.23일 오후 다나카 기이치가 지나가자 김익상, 오성륜, 이종암이 권총을 세 차례 쏘았는데 다나카 기이치는 죽지 않고 지나가던 영국 여인만 죽게되었어요. 이 사건은 실패로 끝났지만 의열단은 이때부터 일본조직에 표적이 되기 시작합니다.


황푸강 서쪽에는 와이탄이라는 곳이 있는데요. 당시 중화민국(지금의 대만; '대만'편을 참고해주세요! ㅎㅎ) 은 잇달아 유럽열강과 일본에게 자신들의 영토를 개방했는데요.  



1843년 난징조약으로 상하이가 강제개방되면서 서양인이 상해에 들어오게 되었는데요. 이때부터 외국인들을 위한 구역이 있어야 한다면서 '조계지'라는 곳을 지정해 각 국가마다 상해를 나누어 자신들만의 타운을 만들게 되요.



상해 관청에서는 외국인들을 효율적으로 규제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계지를 내어주는것에 동의했는데요. 특히 와이탄을 내어준이유는 이곳이 농사나 어업에도 적합하지 않은 진흙땅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기술로 1845년 영국 영사관을 시작으로 1930년대 말까지 은행, 무역 회사, 관공서 등 세계 제일의 항구도시로 만들게 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상해 사람들이 조계지 시절을 암흑기로만 여기지 않았는데요. 왜냐하면 이때 여러 문화를 통해 자유로운 사상이 싹튼 중국 최초의 모던시티었기 때문이에요. 보통 상해에서는 이 시기를 '황금시대' 혹은 '올드 상하이'라 하는데, 이를 테마로 한 상점이나 카페도 많이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와이탄에서는 상해의 야경을 볼 수 있는 핫 스팟이 있어요.



와이탄으로 가면 굉장히 볼 것도 많고 살 것도 많지만 그곳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숨결도 느낄 수 있으시다면 더 좋을거에요!








[글 래퍼런스]

https://ko.wikipedia.org/wiki/%EC%9D%98%EC%97%B4%EB%8B%A8

https://news.joins.com/article/20425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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