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번글에서는 상해여행에서 많은 분들이 못보고 지나치실 곳에 대해서 설명드릴거에요~





<1.쑹칭링 능원>


쑹칭링 능원은 만국공동묘지로 상하이 조계시절 외국인들의 공동묘지였답니다. 쑨원의 부인이었던 쑹칭링이 이곳에 묻히면서 쑹칭링 능원으로 불렸다고해요. 쑹칭링은 처음에는 계파가 없었지만 나중에 쑨원이 죽고 공산당에서 상징적인 인물로 활약한 인물이에요. 장제쓰와는 지속해서 대립한 인물이었죠. (쑹칭링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아래 따로 설명해놓을게요!)




능원 북쪽에는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 선생님을 비롯, 신규식, 노백린, 김인전, 안태국, 김태연 등의 독립운동가 19인의 무덤이 있다고 하는데요. 실제로는 5곳 (박은식, 노백린, 신규식, 안태국, 김인전)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어디에 묻혀 있는지 모른다고해요. 그 이유는 중국이 공산화가되면서 외국인 묘역에 묻힌 모든 외국인들을 제국주의자로 간주하여 묘역을 훼손했기 때문이에요.



확인된 시신 5구는 1993년 동작동 국립뮤지로 이장되었고, 1995년 윤현진, 오영선 선생 등 2인의 유해는 1995년 봉환 이장됐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방문했을당시 'TAI Y KIM', 'LI YOUNG SON'이라는 영문명만 있는 묘비가 있어서 의아했었는데요. 나중에 알아보니 독립운동가 '김태연 지사', '이덕삼'의 영문명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영문명으로 기재한 이유는 분단된 한반도에서 남한을 조국으로 해야할지, 북한을 조국으로 해야할지 결정하지 못한 부분 때문이라고 하네요. 하지만 다행히 김태연 지사 주위에 노란색줄로 들어가지 못하게 해놓았는데요. 나중에 알아보니 제가 방문하고 한달 뒤에 이 분들의 유해가 대한민국으로 봉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봉환작업이 진행되던 상태가 아니었나라는 생각이들었습니다.



사실 김태연 지사의 유해가 봉환되었다는 기사를 쑹칭링 능원에 방문했을때 현장에 있던 가이드분으로부터 들었는데요 (저는 자유여행으로 오긴했는데 그곳에 가이드분들이 여행객들이랑 계셨더라구요ㅎㅎ ). 마지막으로 고국으로 돌아오시기전에 '한달뒤에 한국에서 뵙겠습니다'라고 인사드리고 나왔습니다. 





<2. 쑹칭링>



1) 쑨원과의 만남


무능한 청나라에 화가난 쑨원은 신해혁명을 일으키게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홍콩편'을 참고해주세요!). 이러한 흐름속에서 당시 우월했던 서구문화를 배우려는 움짐임이 있었어요. 당시 쑨원의 동지인 찰리 쑹은 항해 푸둥 구 (푸둥국제공항이 있는곳이에요!) 에서 사업가이자 선교사였는데요. 찰리 쑹의 둘째 딸인 쑹칭링은 이러한 아버지 밑에서 신식학문을 배우고 미국 조지아주 메이컨에 있는 대학교를 졸업하게됩니다. 또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로자드먼'이라는 세례명도 받게되죠 (찰리 쑹의 넷째딸은 쑹메이링인데 이 분은 중화민국 총통의 장제스 부인인데요. 훗날 쑹메이링은 자유민주주의 진영에서 쑹칭링은 공산주의 진영에서 첨예하게 대립하게 됩니다. 아, 참고로 쑹메이링은 임시정부에 굉장한 도움을주어 1966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훈1등)을 수여 받기도합니다).


쑹칭링은 아버지의 동료인 쑨원과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26살이나 높고 자신의 동료인 쑨원과 결혼한다는 소식에 찰리쑹은 쑹칭링은 가두어버립니다. 하지만 시녀의 도움으로 탈출한뒤 밀항선을 타고 당시 도쿄에서 망명중이었던 쑨원을 만나 1915.10.25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사진1. 쑹칭링>


<사진2. 쑹메이링>





2) 쑨원의 사망 후 장제스의 등장


1925년 쑨원이 사망하고 국민당의 권력은 장제스에게 넘어갔어요. 1926.02 장제스는 중화민국의 통치권을 확립하기 위해 북벌을 준비했는데요. 당시 국민당에는 우익과 좌익진영이 있었고 동시에 공산당이 점차 세력을 넓혀갔어요. 


1927.04.12 장제스는 상해에서 반공 숙청을 감행했는데 이때 쑹칭링은 장제스와 격렬하게 대립하게 되고 좌파당원에 속하게 됩니다. 


그해 국민당으로부터 공산당원들이 제명된 후, 쑹칭링은 모스크바로 떠났는데요. 1927.12월 자신의 여동생 쑹메이링 여사가 장제스와의 결혼을 결정하려하자 굉장히 반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모스크바로 온 쑹칭링에게 스탈린은 장제스에게 협조하라는 말을 하는데요 (아마 당시 소련과 중화민국은 반일본으로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나봐요). 이에 쑹칭링은 베를린으로 다시 망명을가게됩니다. 


1931.06 베를린에서 중화민국으로 다시 귀국을 한 쑹칭링은 국민당 일당독재를 비판하는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외에 고문, 연좌제, 사형제도 폐를 위해 노력했다고 하네요. 국민당도 이런 쑹칭링이 달갑진 않았지만 쑨원의 부인이었다는 상징성 때문에 감시만했다고합니다.



3) 제2차 국공합작과 쑹칭링의 등장


1937.11 중일전쟁으로 인해 쑹칭링은 홍콩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구호품과 돈을 모집해 중국 공산당을 지원했습니다. 1940.04 충칭에서 그녀의 가족들과 장제스가 같이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이며 공산당 진영과 국민당 진영이 통일전선을 구축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일본이 패망하고 국민정부는 쑹칭링의 직위를 승진시키면서 정부에 협조하기를 요구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공산당특으로 전향해 중국 국민당 혁명위원회의 초기 명예주석을 맡습니다 (공산당은 본래 국민당 아래 하나의 좌파단체라는 인식이 강해 당시에는 국민당 혁명위원회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고 하네요).




4) 제2차 국공내전


일본이 패망하고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에는 다시 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내전을 피하기위해 1945.08~09 기간동안 충칭에서 장제스와 마오쩌뚱이 만나 회담을 같고 그해 10월에 정치적 민주화를 추진하는 것에 관한 합의가 도출됩니다.


이러한 합의에도 불구하고 양측간의 갈등이 커지게 되었고, 결국 1946.06 국민혁명군은 본격적으로 공산당 지구를 침공하게됩니다. 


초기에는 국민당(국민혁명군)의 힘이 더 우세했고 미국의 지원까지 입어 공산당(인밍해방군; 홍군)을 금방 내전이 종식될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지속적인 전략적 실패와 국민당 정부의 내부 부패,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 붕괴로 인해 전세가 역전되게 됩니다.


공산당은 1949.10.01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지금의 중국) 수립을 선포하고 국가주석에 취임합니다. 그해 중화인민공화국은 10.14 광저우와 11.30 충칭을 점령하면서 중화민국을 현재의 대만(타이완)으로 몰아내게됩니다. 이후 쑹칭링은 지속적으로 중국 공산당에 가담하여 1959~1965년까지 둥비우와 함께 중화인민공화국의 제2대 부주석과 1965~1975년까지 제3대 부주석을 역임했고, 1981년 명예주석에 추대되었다가 90세의 나이로 사망하게됩니다.


상해에 가시면 옛 프랑스 조계지에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회지 건물이 있는데요. 이곳에서 프랑스의 눈을 피해 마오쩌뚱을 비롯한 전국 각지 공산당인물 13인이 모여 중국공산당 성립을 성포했다고 해요.

(가니까 학생들이 엄청 많더라구요;;;;)






<2. 김대건 신부>


김대건 신부 (대건 안드레아)는 조선의 최초의 사제로 알려진 인물이에요. 


1821년 출생한 김대건 신부의 집안은 천주교를 믿고 있었어요.  하지만 조선정부의 종교탄압으로 인해 1839년 기해박해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피신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죠.


한양에서 라틴어와 기초 신학공부를 마친 후, 만주와 요동을 거쳐 마카오에 가서 신학 수업을 받게 되었어요. 당시 이들을 지도했던 피에르 모방 신부는 북경이나 중국인 신학교를 탐탁치 않았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유럽령(포르투갈령)인 마카오로 가게 됩니다 (당시 홍콩은 아직 영국의 지배를 받기 전이었어요!)


(마카오에서 김대건 신부와 관련된 글은 여기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사진3>


하지만 마카오에서도 민란이 일어나 상해로 피신하게 되는데요. 이때 상해에서 조선 최초로 사제서품을 받게 됩니다. 사제는 오늘날의 신부라고 보시면 되는데요. 카톨릭의 계급 서열이 아래와 같다는 것을 알면 신부가 갖고 있는 의미를 자세히 이해하실 수 있으실거에요 (보통 성당을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신부님 밑에 평신도라고 불려요). 대주교는 나라마다 존재하는데요. 대한민국에서는 현재 서울, 대구, 광주에 대교구가 있고 8명의 대주교 (현역2명, 명의2명, 은퇴2명)가 있다고 합니다.


<사진4>


이번 상해에서는 김대건 신부께서 사제서품을 받은 진쟈상 성당을 방문했어요. 보통 카톨릭 신도들은 성지순례 목적으로 방문하는 곳이기도해요 (저 또한 카톨릭 신도라 방문해봤어요 ㅎㅎ 제 세례명은 '니콜라오'입니다 ㅎ).



사실은 상하이 시에서 부속건물을 짓기 위해 진쟈상 성당을 허물었는데요. 한국 천주교에서 다시 복원을 해서 오늘날의 진쟈상 성당이 있는거라고 하네요 (그래서 김대건 신부님이 실제로 사제를 받은 곳은 복원되기 전 진쟈상 성당이 있던 장소라고해요). 아래사진을 자세히 보시면 동상이 보이는데요 (이미지 중앙을 잘 보시면...ㅎㅎ). 이 동상이 김대건 신부 동상이라고 하네요.



내부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미사시간이 아니라 들어가지 못했어요. 그러니 진쟈상 성당을 방문하실 목적이 있으시면 미리 미사시간을 확인하시고 가시는걸 추천해요!




이번글에서는 상해외전1편을 다루어봤어요~

다음글에서는 상해외전2편을 다루도록 해볼게요~




[사진 래퍼런스]

사진1

https://ko.wikipedia.org/wiki/%EC%91%B9%EC%B9%AD%EB%A7%81

사진2

https://namu.wiki/w/%EC%91%B9%EB%A9%94%EC%9D%B4%EB%A7%81

사진3

http://www.solmoe.or.kr/page_Kpoc71/614

사진4

http://m.news.zum.com/articles/1102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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