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번글에서는 일본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침략을 시작하게된 제물포조약, 갑신정변 부터 ~까지(일어나는 조선이 격변하는 시기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1. 제물포 조약과 갑신정변 그리고 부정부패>


임오군란으로 일본은 피해보상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반적인 상식선에서의 보상수준이 아닌 일본군대를 궁안에 배치하라는 요구조항이 문제가 되었죠. 하지만 청나라 군대가 임오군란(1882)을 수습한 후 조선에 더욱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어요. 당시 청나라 주재로 있었던 위안스카이(홍콩편에서 언급한바 있죠?ㅎㅎ)가 내정간섭을 심하게 하게됩니다.


또한 고종 곁에서 개화를 주장하는 두 집단(민씨(명성황후)세력의 개화파 VS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의 급진개화파)이 있었어요. 하지만 두 집단간에는 방향성의 차이가 있었어요. 급진개화파였던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은 아편전쟁을 통해 몰락한 청나라보다 일본식 근대화를 이루어 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그렇게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의 급진 개화파는 일본의 도움을 받아 청나라를 몰아내려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런데 당시까지만해도 일본은 조선에 무력으로 침략할 생각은 없었다고해요.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은 일본의 문명개화의 중심인물인 후지카와 유키치라는 인물을 찾아가 자문을 구하게 됩니다.


<사진1. 후지카와 유키치>


후지카와 유키치라는 인물은 처음에 조선에게 굉장히 우호적인 자세를 취했어요. 조선 또한 일본이 개화하기 전의 상태와 비슷하다고 보았고 조선의 개혁을 적극지원하자고 주장했어요. 당시 정한론(한국을 정벌하자)을 주장하던 군국주의자들의 주장을 묵살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그리고 일본세력은 '갑신정변(1884)'을 일으켰는데요. 당시 민씨(명성황후)세력이 청나라의 위안스카이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위안스카이는 군사를 이끌고 창덕궁을 공격하기 시작했어요. 문제는 급진개화파를 도와주려고 했던 일본세력이 약속을 저벼리고 물러나게되면서 갑신정변은 3일만에 마무리되었어요. 그래서 이를 3일천하라고해요.


급진 개화파를 지지했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후에 조선의 멸망을 바란다는 태도를 취했다고 합니다 (아니 약속안 지킨건 그쪽인데 왜....)


아무튼 이후에 일본은 임오군란때처럼 비슷한 핑계로 보상을 요구하게 되었고, 청나라의 간섭도 심화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조선의 주권은 약해져갔는데요. 1885년 일본과 청나라는 '텐진조약'에 따라 청나라의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면 일본의 군대도 조선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합니다.








<2. 제1차 동학농민운동 그리고 김구의 등장>


백성들은 '텐진조약'을 통해 조선 정부에 무능함을 보게되었어요. 조선 관리들은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하려는 노력을 보이기는 커녕 자신들의 안위를 챙기고자 부정부패를 일삼기 시작했어요. 대표적인 예로, 곡창지대인 전라도 쌀들을 조선관리들이 더 많이 가져가고 있었답니다. 


당시 청나라에도 서양세력에 의해 서학(천주교; Catholic)이 퍼지고 있었어요. 조선에서는 본래 유교, 불교, 선교 (삼교)에 기반을 두고 있었는데, 최제우는 서학에 대항하고자 삼교를 통합시킨 동학(인내천 사상)을 창시하게 됩니다. 그리고 조선관리의 부패를 보고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동학'에 기반을 둔 농민 '전봉준'과 함께 1894년 1월 전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신임군수의 회유에 의해 동학농민군은 스스로 해산하지만 한양에서 내려온 정부관료가 민란관련자를 혹독하게 탄압하게 됩니다. 그러자 1894년 최제우를 중심으로 한 동학 지도자들과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동학농민군이 다시 한 번 집결하게 됩니다. 이때는 전국적으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당시 황해도 동학 대표자로써 김창수라는 인물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훗날 김창수라는 인물을 김구라고 부르게 되죠.


동학농민군은 생각외로 정부군을 차례대로 격파하면서 기세를 올리게 됩니다.








<3. 일본의 본격적인 침입시작>



1) 일본의 경복궁 습격 (1894.6.21) 그리고 청일전쟁


고종은 동학농민군에게 패하게 되자 수습을 위해 또;;; 청나라 군대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텐진조약'에 따라서 일본군도 들어오게 되었어요. 


동학농민군은 외세가 간섭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정부와 빠르게 합의했어요. 이로인해 원칙적으로 청나라군대와 일본군대는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청나라 달리 일본군은 자신들의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어요. 그 이유는 아직 동학농민운동이 끝나지 않았다고 스스로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에요 (아니.. 도대체 끝났다는데 뭐라는건지 .....).


하지만 실제 의도는 조선을 개혁하기 위함이었어요. 하지만 일본측도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청나라 군대도 계속 조선에 주둔하고 있었어야 동학농민운동이 끝나지 않았다는 대의명분을 만들 수 있어 청나라에게 같이 조선에 군대를 두어 조선을 개혁하자고 했어요. 하지만 청나라는 그건 조선이 알아서 할 거라며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일본은 태도를 급격하게 바꾸어 (아니 얘네들은 왜 이렇게 명분을 바꾸는걸 좋아하는거야;; 거짓말 하는걸 좋아하는건지 신의같은건 원래 없는건지;;) 1894.6.21일 기습적으로 경복궁을 점령했고 고종에게 청과 맺은 모든 조약을 파기하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러자 1894.7.25일 9개월 전쟁기간의 서막인  청일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일본의 승리로 마감됩니다.




2) 2차 동학농민 운동(1894.9.18) 그리고 갑오개혁


당연히 청나라가 이길거라고 생각했던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나게 되자 조선뿐만 아니라 세계가 충격에 빠지게 되었어요. 조선정부는 그 어떤 조치를 취하지 못했지만 오히려 민초들이 일본에 대항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해요. 


조정에게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시키는것보다 일본의 침략을 막는것이 먼저라고 판단한 동학농민군은 1894.9.18 2차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하지만 한양으로 북상하는 도중 1894.11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정부군까지 합세한 공격을 받아 대패하게되요 (우금치 전투). (정말 정부관료들은 뭘한건지... 가진거 없는 민초들도 나라를 지키겠다고 나서는데..)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청나라로부터 조선의 실질적인 지배권을 빼았게 되었어요.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한 급진 개화파들이 일본의 위세를 얻고 다시 조선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조선의 근대화하려는 갑오개혁을 실시하게 됩니다.


갑오개혁은 총 3차례의 개혁으로 나뉘는데, 1차 갑오개혁, 2차 갑오개혁, 3차 갑오개혁(을미개혁)을 통해 '신분제(노비제)'의 폐지, 인신 매매 금지, 조혼 금지, 과부의 재가 허용, 고문과 연좌법 폐지, 은본위제 등 조선의 봉건적 폐습을 없애고 근대적 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했어요. 



이 부분에서 갑오개혁에 대한 제 개인적인 생각을 써보려고해요.


갑오개혁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오가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갑오개혁 자체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봉건적 세습이 폐지되고 이 나라가 근대화를 이루는 기틀을 마련했기 때문이에요. 그렇다고 일본의 침략이 정당하다고 말하는건 '절대' 아니에요! 일본이 조선에 간섭하지 않고 처음부터 청나라 땅에서 자기들끼리 전쟁하고 이겼으면 조선도 일본의 힘을 인정했을거고, 일본의 근대화를 배우려는 움직임이 컸을거에요. 그렇게 조선은 일본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며 많은 교류를 진행했을거고 양국간의 역사는 지금과 180도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을거에요.  






<4. 러시아의 등장 그리고 아관파천>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조선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점점 넓혀가기 시작했어요.



기세등등한 일본은 조선을 지나 요동을 점령하고 만주까지 점령하려고 했는데요. 당시 청나라에 영향력을 펼치고 있던 유럽국가들은 일본이 커지는 것을 막고자했어요. 러시아와 그 외 유럽국가들은 일본에게 청나라에 요동을 반환할 것을 요구했고 일본도 아직까지는 자신들의 힘이 유럽국가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하여 반환요구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사진2>


일본이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자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이용해 일본을 견제하려고 했어요. 그렇게 조선정부는 친러세력으로 바뀌고 있었어요. 하지만 일본은 조선내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이 감소되는것을 막기위해 친러세력의 중심인물인 명성황후를 시해하게 됩니다. 이를 을미사변(1895)이라고해요. 




고종은 자신도 살해위험을 느껴 1896~1897년 러시아 공사로 피신하게 되는데 이를 아관파천이라고 합니다.







<5. 대한제국의 탄생과 러일전쟁>


고증은 1987년 조선에 복귀하자마자 세로운 조선을 만들고자 하는 이념으로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게 됩니다. '대한'이라는 이름은 10세기의 후 삼국 시대의 후고구려, 후백제, 신라를 가리키는 마한, 진한, 변한 (삼한)에서 유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삼한이 통일되었다는 의미에서 대한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하네요. 그리고 국호를 변경하면서 제국이라고 선포했기 때문에 대한제국이라고 불렸다고해요. ('대한민국'의 대한도 여기서 유래가 되었다고해요)


명성황후가 훗날 평판이 좋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당시 백성들에게는 국모가 시해당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반발심이 극에 달해있었어요. 고종이 조선에 돌아오고 친러세력이 자리를 잡게되자 갑오개혁 중심 인물들이 백성들에게 살해되거나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합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영국과 러시아의 세력다툼이 진행되고 있었는데요. 러시아는 만주와 대한제국으로 세를 확장하길 원했고, 영국과 일본은 러시아가 세력이 확장되는것을 원치않았어요. 그래서 1902년 영일동맹을 맺게됩니다. 당시 러시아 군대는 모스크바쪽에 전선을 펼치고 있었는데, 시베리아횡단철도가 아직 완공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대한제국까지 당도하려면 시간이 걸렸다고해요. 그래서 일본은 철도가 완공되기전에 먼저 선제공격을 감하게 되었고 이렇게 1904.02 러일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6. 한일의정서와 헤이그 특사>


러일전쟁을 시작하고 일본은 재빨리 대한제국에 들어와 강제로 한일의정서(1904.02)를 체결하게됩니다. 한일의정서에는 대한제국의 군사기지 사용권과 여러 요구사항들이 포함되어 있었어요. 또한 그해 8월에 제1차 한일협약이 이루어지게 되고, 스티븐스라는 미국인이 대한 제국에 (외교) 고문관으로 오게 되고, 일본의 메가타라는 사람이 재정고문으로 오게됩니다.


러시아의 영토가 확장되는 것을 경계하던 일본, 미국, 영국은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재정적인 도움을 주면서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이끌게 됩니다 (이때 일본이 러시아와 해전에서 이길 수 있었던 이유도 영국에서 중간에 지속적인 방해를 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나오더라구요).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1905년 대한제국의 화폐정리사업을 통해 대한제국의 화폐를 일본의 화폐로 바꿔버리는 만행을 저지르면서 본격적으로 대한제국의 경제까지 침범하게 됩니다.



사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조금만 더 전쟁을 지속했으면 일본을 이겼을 것이라는 평이 있어요. 그런데 이때 미국이 제 빨리 러시아와 일본을 중재하게 되었고 러시아, 미국, 일본 세 나라는 일본의 대한제국 지도 보호를 승인하는 포츠머스 조약을 맺게 됩니다.


그리고 일본은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아 러일전쟁에서의 손실을 메우려고 했죠. 이토 히로부미를 중심으로 제2차 한일협약을 맺게되었는데요. 이때 이완용, 이근택, 이재용, 박제준, 권중현이 한일협약에 참가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것에 동의를 하게 됩니다. 그 후 우리는 이들을 을사년 늑약 (을사늑약)에 참가한 5명의 인물들을 을사오적이라고 부르게되죠. 결국, 1905년 대한제국은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을 통해 일본에 의해 외교권까지 박탈당하게 됩니다. 



<사진3. 을사오적>


을사조약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가 제1대 통감으로 대한제국에 들어오게 되는데요. 제2차 한일협약이 있은 후 대한제국에서도 이러한 사태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2년뒤 헤이그 특사를 보내 일본의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알리려고 했는데요 (헤이그 특사는 나중에 블라디보스톡 편에서 더 자세히 다룰게요~). 하지만, 일본의 로비로 인해 헤이그 특사들이 이루고자했던 목적달성은 실패하게 되고,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일본은 고종을 강제퇴위 시킵니다.








<7. 기유각서 그리고 일제강점기 시작>


고종위 강제퇴위되고 1907.07 한일신협약(정미7늑약)을 체결함으로써 일본 통감의 권한을 한층 강화시켰습니다. 일본 통감은 이때부터 대한제국의 차관급 임명권을 갖게되어 대한제국의 정치권까지 손에 넣게 됩니다. 


제1대 이토 히로부미를 시작으로 제2대 통감 소네 아라스케 (1909), 제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 (1910)까지 이어지게되고,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이완용과 함께 1910.8.29일 대한제국의 국권피탈을 의미하는 문서에 도장을 찍게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조약을 한일병탄조약이라고 부르고 이 날을 경술국치의 날로써 기억하게 됩니다.


이렇게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답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이후 한반도를 다스리는 조선 총독부의 초대총독이 됩니다. 즉, 1905~1910년에는 통감부가 있었다면, 일제강점기인 1910~1945년에는 총독부가 한반도를 지배하게되죠. 





이번장에서는 일제강점기가 일어나기 직전까지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았어요. 다음글에서는 3.1 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일제강점기에 대한 글을 써보도록 할게요!






 

[사진 래퍼런스]

사진1

https://ko.wikipedia.org/wiki/%ED%9B%84%EC%BF%A0%EC%9E%90%EC%99%80_%EC%9C%A0%ED%82%A4%EC%B9%98#%EC%83%9D%EC%95%A0_%ED%9B%84%EB%B0%98

사진2

https://hansemm.tistory.com/277

사진3

https://learningnara.tistory.com/entry/%EC%9D%84%EC%82%AC%EC%98%A4%EC%A0%81-%ED%9B%84%EC%86%90-%EC%95%84%EC%A7%81%EB%8F%84-%EC%9E%98-%EB%A8%B9%EA%B3%A0-%EC%9E%98%EC%82%AC%EB%8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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