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번시간에는 상해 여행중에서 예원과 그리고 우전(우한 아니에요! 그리고 여행날짜도 2019.03월 이었어요!) 여행 다녀온 후기를 작성하려고해요!






<1.예원>




혹시 '점입가경'이라는 사자성어를 들어보셨나요? 점입가경(점점 점, 들 입, 아름다울 가, 지경 경)이라는 뜻은 점점 안으로 들어갈수록 아름다운 재미있는 곳으로 들어간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이 말의 어원이 된 곳이 예원이라고해요.






예원은 명나라 1577년에 개인정원으로 만들어 졌어요. 하지만 건립 후 상인이 매입하여 1760년까지 방치되어 있다가 1842년 아편전쟁이 일어나자 영국군이 이곳을 5일간 점령했다고 합니다. 1942년에는 일본군에 의해 심하게 손상입었고, 그러다가 1956~1961년 사이에 상하이 시 정부에의해 보수되었고 1961년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고 하네요. 1982년에는 국가 단위의 문화재로 공표되기도 했습니다.



상해를 방문하면 꼭 가보는 곳이 예원인데요. 낮에도 가면 이쁘지만 저녁에 가면 정말 아름다워요. 


처음에는 건물의 웅장함과 중국 특유의 가옥구조로 인해 굉장히 놀랬어요. 꼭 애니메이션 만화에나 나올 법한 그런 곳이었어요.







특히 예원에는 굉장히 많은 상점이 있어요. 이곳에서 기념품을 구매하시는 분들도 꽤 많더라구요.



상점뿐만 아니라 음식점도 많이 있으니 출출하시면 이곳에서 식사를 하시는것도 나쁘지 않은것 같아요!



특히 예원에는 굉장히 화려한 색채들로 관광객들을 놀라게 해요!











<2. 우전여행 (우한아니에요ㅜㅜ ). 방문날짜 2019.03>


상해에서 상해 시외버스를 타면 우전이란곳을 여행할 수 있는데요. 우전은 강남수향마을 중 하나에요.


작성중....



(암살의 배경이 되었던 곳도 수향마을이죠! 1:40초 부터 나와요~)




(위의 영상은 6곳의 강남수향마을중 시탕 수향마을이고 제가 간곳은 우전 수향마을이에요!)

 










[글 래퍼런스]

https://ko.wikipedia.org/wiki/%EC%98%88%EC%9B%90

http://themesaytour.co.kr/html/tour_view2.asp?cateno=1&idx=548


안녕하세요~ 


이번글에서는 상해여행에서 많은 분들이 못보고 지나치실 곳에 대해서 설명드릴거에요~





<1.쑹칭링 능원>


쑹칭링 능원은 만국공동묘지로 상하이 조계시절 외국인들의 공동묘지였답니다. 쑨원의 부인이었던 쑹칭링이 이곳에 묻히면서 쑹칭링 능원으로 불렸다고해요. 쑹칭링은 처음에는 계파가 없었지만 나중에 쑨원이 죽고 공산당에서 상징적인 인물로 활약한 인물이에요. 장제쓰와는 지속해서 대립한 인물이었죠. (쑹칭링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아래 따로 설명해놓을게요!)




능원 북쪽에는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 선생님을 비롯, 신규식, 노백린, 김인전, 안태국, 김태연 등의 독립운동가 19인의 무덤이 있다고 하는데요. 실제로는 5곳 (박은식, 노백린, 신규식, 안태국, 김인전)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어디에 묻혀 있는지 모른다고해요. 그 이유는 중국이 공산화가되면서 외국인 묘역에 묻힌 모든 외국인들을 제국주의자로 간주하여 묘역을 훼손했기 때문이에요.



확인된 시신 5구는 1993년 동작동 국립뮤지로 이장되었고, 1995년 윤현진, 오영선 선생 등 2인의 유해는 1995년 봉환 이장됐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방문했을당시 'TAI Y KIM', 'LI YOUNG SON'이라는 영문명만 있는 묘비가 있어서 의아했었는데요. 나중에 알아보니 독립운동가 '김태연 지사', '이덕삼'의 영문명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영문명으로 기재한 이유는 분단된 한반도에서 남한을 조국으로 해야할지, 북한을 조국으로 해야할지 결정하지 못한 부분 때문이라고 하네요. 하지만 다행히 김태연 지사 주위에 노란색줄로 들어가지 못하게 해놓았는데요. 나중에 알아보니 제가 방문하고 한달 뒤에 이 분들의 유해가 대한민국으로 봉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봉환작업이 진행되던 상태가 아니었나라는 생각이들었습니다.



사실 김태연 지사의 유해가 봉환되었다는 기사를 쑹칭링 능원에 방문했을때 현장에 있던 가이드분으로부터 들었는데요 (저는 자유여행으로 오긴했는데 그곳에 가이드분들이 여행객들이랑 계셨더라구요ㅎㅎ ). 마지막으로 고국으로 돌아오시기전에 '한달뒤에 한국에서 뵙겠습니다'라고 인사드리고 나왔습니다. 





<2. 쑹칭링>



1) 쑨원과의 만남


무능한 청나라에 화가난 쑨원은 신해혁명을 일으키게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홍콩편'을 참고해주세요!). 이러한 흐름속에서 당시 우월했던 서구문화를 배우려는 움짐임이 있었어요. 당시 쑨원의 동지인 찰리 쑹은 항해 푸둥 구 (푸둥국제공항이 있는곳이에요!) 에서 사업가이자 선교사였는데요. 찰리 쑹의 둘째 딸인 쑹칭링은 이러한 아버지 밑에서 신식학문을 배우고 미국 조지아주 메이컨에 있는 대학교를 졸업하게됩니다. 또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로자드먼'이라는 세례명도 받게되죠 (찰리 쑹의 넷째딸은 쑹메이링인데 이 분은 중화민국 총통의 장제스 부인인데요. 훗날 쑹메이링은 자유민주주의 진영에서 쑹칭링은 공산주의 진영에서 첨예하게 대립하게 됩니다. 아, 참고로 쑹메이링은 임시정부에 굉장한 도움을주어 1966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훈1등)을 수여 받기도합니다).


쑹칭링은 아버지의 동료인 쑨원과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26살이나 높고 자신의 동료인 쑨원과 결혼한다는 소식에 찰리쑹은 쑹칭링은 가두어버립니다. 하지만 시녀의 도움으로 탈출한뒤 밀항선을 타고 당시 도쿄에서 망명중이었던 쑨원을 만나 1915.10.25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사진1. 쑹칭링>


<사진2. 쑹메이링>





2) 쑨원의 사망 후 장제스의 등장


1925년 쑨원이 사망하고 국민당의 권력은 장제스에게 넘어갔어요. 1926.02 장제스는 중화민국의 통치권을 확립하기 위해 북벌을 준비했는데요. 당시 국민당에는 우익과 좌익진영이 있었고 동시에 공산당이 점차 세력을 넓혀갔어요. 


1927.04.12 장제스는 상해에서 반공 숙청을 감행했는데 이때 쑹칭링은 장제스와 격렬하게 대립하게 되고 좌파당원에 속하게 됩니다. 


그해 국민당으로부터 공산당원들이 제명된 후, 쑹칭링은 모스크바로 떠났는데요. 1927.12월 자신의 여동생 쑹메이링 여사가 장제스와의 결혼을 결정하려하자 굉장히 반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모스크바로 온 쑹칭링에게 스탈린은 장제스에게 협조하라는 말을 하는데요 (아마 당시 소련과 중화민국은 반일본으로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나봐요). 이에 쑹칭링은 베를린으로 다시 망명을가게됩니다. 


1931.06 베를린에서 중화민국으로 다시 귀국을 한 쑹칭링은 국민당 일당독재를 비판하는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외에 고문, 연좌제, 사형제도 폐를 위해 노력했다고 하네요. 국민당도 이런 쑹칭링이 달갑진 않았지만 쑨원의 부인이었다는 상징성 때문에 감시만했다고합니다.



3) 제2차 국공합작과 쑹칭링의 등장


1937.11 중일전쟁으로 인해 쑹칭링은 홍콩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구호품과 돈을 모집해 중국 공산당을 지원했습니다. 1940.04 충칭에서 그녀의 가족들과 장제스가 같이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이며 공산당 진영과 국민당 진영이 통일전선을 구축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일본이 패망하고 국민정부는 쑹칭링의 직위를 승진시키면서 정부에 협조하기를 요구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공산당특으로 전향해 중국 국민당 혁명위원회의 초기 명예주석을 맡습니다 (공산당은 본래 국민당 아래 하나의 좌파단체라는 인식이 강해 당시에는 국민당 혁명위원회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고 하네요).




4) 제2차 국공내전


일본이 패망하고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에는 다시 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내전을 피하기위해 1945.08~09 기간동안 충칭에서 장제스와 마오쩌뚱이 만나 회담을 같고 그해 10월에 정치적 민주화를 추진하는 것에 관한 합의가 도출됩니다.


이러한 합의에도 불구하고 양측간의 갈등이 커지게 되었고, 결국 1946.06 국민혁명군은 본격적으로 공산당 지구를 침공하게됩니다. 


초기에는 국민당(국민혁명군)의 힘이 더 우세했고 미국의 지원까지 입어 공산당(인밍해방군; 홍군)을 금방 내전이 종식될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지속적인 전략적 실패와 국민당 정부의 내부 부패,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 붕괴로 인해 전세가 역전되게 됩니다.


공산당은 1949.10.01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지금의 중국) 수립을 선포하고 국가주석에 취임합니다. 그해 중화인민공화국은 10.14 광저우와 11.30 충칭을 점령하면서 중화민국을 현재의 대만(타이완)으로 몰아내게됩니다. 이후 쑹칭링은 지속적으로 중국 공산당에 가담하여 1959~1965년까지 둥비우와 함께 중화인민공화국의 제2대 부주석과 1965~1975년까지 제3대 부주석을 역임했고, 1981년 명예주석에 추대되었다가 90세의 나이로 사망하게됩니다.


상해에 가시면 옛 프랑스 조계지에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회지 건물이 있는데요. 이곳에서 프랑스의 눈을 피해 마오쩌뚱을 비롯한 전국 각지 공산당인물 13인이 모여 중국공산당 성립을 성포했다고 해요.

(가니까 학생들이 엄청 많더라구요;;;;)






<2. 김대건 신부>


김대건 신부 (대건 안드레아)는 조선의 최초의 사제로 알려진 인물이에요. 


1821년 출생한 김대건 신부의 집안은 천주교를 믿고 있었어요.  하지만 조선정부의 종교탄압으로 인해 1839년 기해박해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피신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죠.


한양에서 라틴어와 기초 신학공부를 마친 후, 만주와 요동을 거쳐 마카오에 가서 신학 수업을 받게 되었어요. 당시 이들을 지도했던 피에르 모방 신부는 북경이나 중국인 신학교를 탐탁치 않았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유럽령(포르투갈령)인 마카오로 가게 됩니다 (당시 홍콩은 아직 영국의 지배를 받기 전이었어요!)


(마카오에서 김대건 신부와 관련된 글은 여기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사진3>


하지만 마카오에서도 민란이 일어나 상해로 피신하게 되는데요. 이때 상해에서 조선 최초로 사제서품을 받게 됩니다. 사제는 오늘날의 신부라고 보시면 되는데요. 카톨릭의 계급 서열이 아래와 같다는 것을 알면 신부가 갖고 있는 의미를 자세히 이해하실 수 있으실거에요 (보통 성당을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신부님 밑에 평신도라고 불려요). 대주교는 나라마다 존재하는데요. 대한민국에서는 현재 서울, 대구, 광주에 대교구가 있고 8명의 대주교 (현역2명, 명의2명, 은퇴2명)가 있다고 합니다.


<사진4>


이번 상해에서는 김대건 신부께서 사제서품을 받은 진쟈상 성당을 방문했어요. 보통 카톨릭 신도들은 성지순례 목적으로 방문하는 곳이기도해요 (저 또한 카톨릭 신도라 방문해봤어요 ㅎㅎ 제 세례명은 '니콜라오'입니다 ㅎ).



사실은 상하이 시에서 부속건물을 짓기 위해 진쟈상 성당을 허물었는데요. 한국 천주교에서 다시 복원을 해서 오늘날의 진쟈상 성당이 있는거라고 하네요 (그래서 김대건 신부님이 실제로 사제를 받은 곳은 복원되기 전 진쟈상 성당이 있던 장소라고해요). 아래사진을 자세히 보시면 동상이 보이는데요 (이미지 중앙을 잘 보시면...ㅎㅎ). 이 동상이 김대건 신부 동상이라고 하네요.



내부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미사시간이 아니라 들어가지 못했어요. 그러니 진쟈상 성당을 방문하실 목적이 있으시면 미리 미사시간을 확인하시고 가시는걸 추천해요!




이번글에서는 상해외전1편을 다루어봤어요~

다음글에서는 상해외전2편을 다루도록 해볼게요~




[사진 래퍼런스]

사진1

https://ko.wikipedia.org/wiki/%EC%91%B9%EC%B9%AD%EB%A7%81

사진2

https://namu.wiki/w/%EC%91%B9%EB%A9%94%EC%9D%B4%EB%A7%81

사진3

http://www.solmoe.or.kr/page_Kpoc71/614

사진4

http://m.news.zum.com/articles/11025800





 

 

 


안녕하세요~


이번글에서는 민족말살정책을 통해 대한제국을 탄압하려했던 마지막 일제강점기 시기에 대한 글을 쓰려고해요!




<1. 민족말살정책>


일본은 1920년대 민주주의 운동이 일어나긴 했으나 여전히 전쟁을 통해 얻는 이익이 많았기 때문에 여전히 군국주의를 지향하고 있었습니다. 더불어 일본내에서도 정치인들보다 군인들의 권력이 득세를하여 일본내에서 군대를 막을 힘은 더더욱 없어지게 되었죠.




1) 일본의 경제 대공황 그리고 중일전쟁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급성장한 일본은 1929년 이후로 경제거품이 꺼지면서 경제 대공황에 빠지게 됩니다. 충분한 식민지가 있었던 영국과 프랑스와는 달리 식민지가 많지 않았던 미국과 일본은 굉장한 타격을 입게되죠. 그래서 이들은 식민지 확보를 위해 더욱열을 올리게됩니다.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킵니다. '홍콩편'에서 쑨원이 한족을 대표해 청나라를 몰아냈다고 말씀드린바있죠? 일본은 청나라를 지탱하고 있었던 여진족에게 쑨원이 이끄는 한족으로부터 독립을 시켜주겠다는 약속을하고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후이황제를 복위시켜 자신들에 입맛에 맞게 다스리려한 했는데요. 그때 세워진 국가가 만주국(괴뢰국(꼭두각시정권))입니다. 


<사진1. 진한 빨간색 부분이 만주국 영토>


<사진2. 만주국 국기>


일찍 끝날 것 같던 중일전쟁이 국공합작으로 인해 길어지게되자, 군인들의 옷을 만들기 위해 한반도 북부에 면양사육을 독려하고 남부에는 면화재배를 장려하는 남면북양정책을 수립하게 됩니다. 또한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에 발전소를 건립하고 광업 분야를 성장시켜 군수공장을 대거 설립하게됩니다.


1937년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식민지에 확보에 열을 올린 일본은 지식인들을 통한 자발적 징용, 군자금 모음 독려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노동력과 자분을 차출해갑니다.


<사진3>




2) 민족말살정책 (1941~1945)


일본은 중일전쟁을 위해 광적으로 군수물자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이과정에서 조선총독부는 징병제를 실시하여 조선인들을 군대로 내몰았고, 10대 초반에서 40대에 이르는 여성들을 위안부로 삼게됩니다. 또한 남녀노소 할것없이 군수물자 보금을 위해 군수공장등으로 보내게 됩니다. 이렇게 조선인들은 노예취급을 받기 시작합니다.






또한 일본은 조선이라는 뿌리를 지우기 위해 '창씨개명', '조선어금지' 등 민족말살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그리고 일왕을 숭배하고 자신들과 함께 서양세력에 맞써자는 슬로건을 내세워 일본사상을 심으려고 했습니다.









3) 일본 VS 미국 (태평양전쟁)


무리한 전쟁으로 일본의 전쟁자원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식민지 확보의 경쟁상대인 일본의 세력이 커지자 원유를 중단하게되죠. 그래서 일본은 목재와 석유가 많은 인도차이나반도에 있는 인도네시아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게 되죠. 당시에 인도차이나반도는 영국, 프랑스 식민지였는데 일본은 2차세계대전으로 독일과의 전쟁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정신이 없을거라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인도차이나반도를 들어가기 위해선 중화민국을 지나가야하는데 이 당시 중일전쟁이었으므로 일본은 해양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일본이 가는 길목에 미국식민지인 필리핀이 있었죠. 미국은 당시 필리핀에 군사시설을 주둔히키고 동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하려고 했어요. 일본은 인도차이나반도로 들어가기 위해서 필리핀을 치려고 했는데, 당시 미국은 동아시아에 문제가 생기면 하와이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가 출병한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하와이에 주둔한 미군 기지인 진주만 기지를 습격(1941.12.07)하면서 태평양전쟁의 서막을 알립니다.



하와이를 공격한 후 필리핀까지 점령하여 일본은 계속 승승장구하게 되는데요. 이때 필리핀에서 후퇴한 미군사령관이 훗날 6.25 전쟁에 참전한 맥아더 장군이라고 합니다.


드디어 미국이 자신들의 본 힘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요. 미국은 자국내의 생산시설을 재빠르게 군수산업화시키고 일본과의 전면전을 준비하게됩니다. 그리고는 세계에서 제일 큰 일본의 야마코토 군함을 미드웨이해전에서 침몰시키고 일본으로 진격하게되죠.




4) 미국의 세계2차대전 참전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제2차 세계대전을 방관하던 미국은 일본을 공격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독일,일본,이탈리아'가 동맹을 맺고, '미국,영국,소련,중화민국'이 동맹을 맺게 되면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되죠. 독일은 영국과 미국,러시아 사이에서 이중전선을 펼치게 되었고, 일본은 중화민국과 미국 사이에서 이중전선을 펼치고 있었어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의 암호를 풀어내는 앨런튜링; 인공지능의 기반을 만들게 되는 사건)

독일은 이중전선으로 인해 패망하게 되었고, 일본역시 이중전선으로 고전하던 끝에 미국의 히로시마 원폭으로인해 패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반도에서 물러나게되죠.

<사진4. 연합국의 일본 분단계획>




<2. 독립운동>


1) 상해임시정부 그리고 한인애국단


1931년 김구는 직접적인 항일 투쟁을 추진하기 위해 한인애국단을 조직합니다. 그리고 한인애국단의 첫 거사로서 이봉창에게 일왕을 제거하라는 임무를 주게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일본의 고위간부들과 밀정, 친일파들을 처단할 암살 계획을 세우게 되죠. 






2) 윤봉길


3.1 운동에 자극을 받은 윤봉길은 '식민지 노예교육'을 배격하면서 자퇴를 하게됩니다. 1921년 오치서숙에 들어가 학업을 계속하게 되었는데요. 그곳에서 매헌이라는 아호를 얻게됩니다. 오치서숙에 있던 매곡 선생께서는 동지섣달 차가운 논보라 속에서도 꽃을 피워 향기를 내는 '매화'의 '매'와 조선조 충신 성삼문의 '매죽헌'의 '헌'자를 따서 '매헌'이라는 호를 내려주셨다고 합니다.


당시 누군가가 윤봉길에게와서 묘패의 글을 읽어달라고 했는데, 글을 알려주고나서 묘지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 당황해하는 모습을보고 이런 무지가 나라를 망친다는 생각을하게됩니다. 그리고 애국계몽운동을 시작하게되죠.



1929 오치서숙을 졸업한 윤봉길은 농촌계몽활동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계몽운동에 한계를 느끼고 있던 그는 1930년 '장부출가생불환(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이라는 글을 남기고 집을 떠나 중국으로 건너갑니다. 


1931년 중국 상해에서 채소장사를 하던 그는 김구를 찾아가 그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본격적인 무력투쟁운동을 시작하게됩니다.


1932.04.29 상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리는 상해 전승 기념행사에서 거사를 이행하기로 결정합니다. 폭탄은 도시락 모양과 물통 모양으로 제작되었는데, 그 이유는 당시 상해 전승 기념행사에서 일본측이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도시락을 지참시켰기 때문었어요. 그리고 홍커우 공원에서 그는 물통 폭탄을 단상으로 힘차게 던지고 도시락 폭탄으로 자결하려 했으나 폭탄이 불발되고 윤봉길은 체포됩니다. 그리고 몇일후 사형을 당하게 됩니다.



만주사변으로 충격에 빠진 중화민국 장제스는 윤봉길의 의거 소식을 듣고 중화민국의 100만이 넘는 대군도 못한일을 해냈다며 극찬을 했어요. 그리고 중화민국이 이때부터 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기 시작합니다.



저는 3월말정도에 이곳을 방문했는데요. 그곳에 벚꽃들이 아름답게 피어있었어요. 윤봉길 의사께서도 4월이면 의거당시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이었을텐데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요. 



거사 추정지는 윤봉길 의사를 모셔놓은 '매헌정'이 아니라 홍커우 공원 입구 근처라고 해요!




홍커우공원 안으로 들어가 표지판을 따라가다보면 윤봉길의사 생애사적전시관이 나와요.



홍커우 공원안에서도 따로 윤봉길의사 생애사적 전시관이 마련이 되어있는데요. 이곳은 별도로 아래와 같이 운영한다고 하네요!



제가 방문했을때 마친 어린학생들이 와있었어요. 아이들이 선생님한테 질문도 많이 던지는거 같았어요. 윤봉길 의사가 이 모습을 보고 있다면 얼마나 뿌듯해하실까요? 



아이들이 가는 모습까지 한참을 바라보고 생각에 잠기다가 저도 '매헌정 (윤봉길의사 생애 전시관)' 내부로 들어가기 시작했어요. 제가 그곳에 있었을 때는 아무도 계시지 않았지만 들어가자마자 방문하신분들의 흔적을 볼 수 있었죠.



그곳에서 돌아가실때 묶여있던 형틀을 직접 보게 되었어요. 뭐라고 말을해야할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당시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국제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어요.



나오기전 인사를 드리고 나왔답니다.



'매헌정'을 나오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오는데요.



그곳에 가면 이곳의 보수를 위해서 성금을 하는 곳이 있어서 얼마되지 않은 돈을 내고 왔답니다.



'매헌정' 건물을 배경으로 마지막 사진을 찍었습니다.






3) 중일전쟁 발발 그리고 한국 광복군 창설


중일전쟁 발발로 임시정부는 지속적인 이동을하게 되고 1940년 충칭으로 최종 본거지를 옮기게 됩니다. 이전부터(1936) 장제스의 제안으로 임시정부는 중화민국 전역에 있는 무장세력을 규합하여 광복군 조직을 추친하고 있었습니다. 1939.01.08 창립된 임시정부의 여당 한국독립당 당군을 모태로 하였고 만주 독립군인 지청천과 협력하게됩니다. 그리고 1940.05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이 우선 중국 국민당군의 지휘 하에 둔다는 조건으로 한국 광복군 창설을 승인받고, 충칭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됩니다. (이후 1944.08에 모든 지휘 통수권을 임시정부로 넘겨주게됩니다.)



1942년 김원봉이 한국 광복군에 합류하였고,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일본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게됩니다. 한국 광복군의 일체 비용은 미주, 멕시코, 하외이의 동포들이 부담하였으며 장제스의 부인인 쑹메이링이 이끄는 부녀위로총회에서도 자금을 후원하였어요.


1943년 한국 광복군의 일부 대원이 영국군에 파견되어 인도,버마 전선에서 연합 작전을 전개하였어요. 한편 그해 카이로회담에서 미국,영국,중화민국은 한국독립의 필요성을 인정했지만, 중화민국을 제외한 두 국가는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어요. (미국정부에서는 임시정부를 승인하진 않았지만 미국의회에서는 임시정부를 승인했다고 하네요.)


임시정부는 1944년 소련로부터 승인을 받았고, 1945.04 프랑스로부터 사실상 승인을 받는 단계까지 도달했다고합니다. 이렇게 점차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아가고 있던 와중에 미군과 함께 '독수리 작전'으로 알려진 서울 진공 작전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수복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재빨리 일본이 항복하는 바람에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답니다.



4) 해방이후 임시정부


1945.08.15 꿈에 그리던 광복을 이루었지만 임시정부는 아직도 혼란상태였어요. 당시 공산주의 세력들은 민중의 기초 위에 임시정부를 다시 세우자는 취지에서 임시정부의 총사직을 요구했고, 반대로 임시정부 여당인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임원들이 모두 그대로 귀국해야한다고 주장했어요.


미국입장에서는 임시정부가 반갑지 않은 이유는 여러가지였어요. 첫 번째로는 공산주의 세력이 있다는 점이었고, 두 번째는 중화민국 때문이었어요. 중화민국의 장제스는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독립에 모든 원조를 아끼지 않겠다고 했는데요. 미국은 임시정부가 한반도에 들어와 주요관직에 앉게되면 훗날 한반도의 지위를 중화민국에게 뺏길거라는 판단을 했다고해요.


분란을 원하지 않던 김구는 개인자격으로 한반도에 귀국하게 되었고, 미군도 김구 일행을 보호했어요. 김구를 신뢰했던 탓인지 김구의 경호원들도 무기를 소지하도록 허용되었고, 1914.12.01 임시정부 봉영식이 서울에서 열리게 됩니다.








지금까지 일제강점기에 대해서 다루어봤어요. 여행을 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지만 이번 상해 여행을하면서 매번 머리속에 떠올렸던것은 "민족이란 무엇인가, 민족은 왜 꼭 지켜져야만 하는가"라는 질문들이었던거 같아요.


세상은 돈에 의해 움직이는건데 민족을 지킨다고 뭐가 달라지는건지 많이 생각해보다 아래와 같이 생각을 정리하게되었어요.



"돈은 중요하지.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갖기 위해, 좋아하는 이성에게 선물을 하기위해, 생계를 위한 자신의 가족을 위해, 병든 자신의 노부모를 위해 돈은 중요하게 쓰이지. 돈의 뛰어난 범용성은 '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한다'라는 명제의 당위성을 제공해주길 충분하지. 


돈은 중요하지. 110년전 우리가 빠른 산업화를 통해 경제를 발전시키고 그 힘으로 군사력을 증가시켰다면 이렇게 몰락당하지 않았겠지. 


그래... 돈이 최고지...


그런데 유독 상해와서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돈을 위해서 무엇이든 한다. 왜냐하면 돈이 최고기 때문에!'라는 명제에 반증하는 예시들을 많이 보게돼..


당시 대한제국이라고 해봤자 친일파들 위주였으니 나라가 독립운동가들한테 준건 고통뿐이지 않았나? 누가 독립운동한다고 알아주는것도 아니고 오히려 일본은 친일파보다도 독립운동가들을 더 탐했을텐데. 그리고 돈도 많이 주려고 했고 관직까지 보장했을텐데...


그들이 정말 돈을 거부한것일까?


만약 그들이 돈을 받고 나라를 팔았다면 우리는 훗날 일본인으로써 살지만 불리한 상황만되면 천한 조선인이라는 소리를 들었을거고, 천한 조선인이라는 말을 사실이라고 받아들였을테지...


사실 친일파나 독립운동가나 똑같이 돈이 중요했겠지... 아니 오히려 독립운동가들은 누구보다 힘들었으니 돈의 중요성을 더 절실하게 느꼈을거야


그런데 돈이라는건 원래 가치에서 출발한거잖아? 화폐의 역사를 보더라도 돈은 어떤 필요에 의해서 생긴거고 사람들은 저마다 필요 가치가 달라. 친일파에겐 자신들의 평안이 필요했던거고 독립운동가들은 민족의 평안이 필요했던거 뿐이야. 


그래서 친일파들은 자신들에게 배팅을 한거고 독립운동가들은 민족에게 배팅을 한거겠지. 그때까지만해도 친일파들은 자신들의 배팅이 옳았다고 판단했을거야. 그런데 돌아가신 독립운동가들은 알까? 자신들의 배팅이 미래에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켰는지 말이야."





"당신들은 틀리지 않았어. 당신들은 돈으로 가치를 산 것이 아니라 가치를 통해 돈을 얻는거야. 그것도 대한민국이라는 엄청난 재산을...."












(원본영상은 아닌데 재밌어서 가져와봤어요 ㅎㅎㅎㅎㅎ)















[사진 래퍼런스]

사진1,2

https://ko.wikipedia.org/wiki/%EB%A7%8C%EC%A3%BC%EA%B5%AD

사진3

http://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044&num=200019

사진4

https://ko.wikipedia.org/wiki/%EC%A0%9C2%EC%B0%A8_%EC%84%B8%EA%B3%84_%EB%8C%80%EC%A0%84#%EC%B6%94%EC%B6%95%EA%B5%AD%EC%9D%98_%EB%B6%95%EA%B4%B4,_%EC%97%B0%ED%95%A9%EA%B5%AD%EC%9D%98_%EC%8A%B9%EB%A6%AC



안녕하세요~


이번글에서는 지난번에 이어 문화통치 시기에 일어났던 독립운동에 대해서 알아보려고해요!

지난글에서는 의열단에 알아보았으니 이번글에서는 '상해임시정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왜 하필 상해인가?>


상해는 일본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의 조계지가 있어 일본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있었어요. 그리고 독립지사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우호적인 프랑스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 조계지에서 주로 거주를 했답니다. (왜 프랑스가 우호적이었는지는 여기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제3호 임시정부는 상해 조계지와 가까워요. 조계지 근처에는 아름다운 카페도 많으니 천천히 둘러보시면 좋을것 같아요!)



3.1 운동 직후 국민들을 대표할 조직의 필요성을 인지했으나 당시 순종이 건재하고 있어 망설이고 있었어요. 하지만 조선총독부에 맞서 민족의 망명정부를 조직해야 한다고 판단한 민족지도자들은 임시정부를 수립할 계획을 갖게 됩니다.




1) 1호 임시정부 청사, 김신부로


1919.04.10 상해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에서 지역 교포들과 신한청년당이 주축이 되어 29인의 임시의정원 제헌의원이 모여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정하게 됩니다. 이때 대한제국으로 망했는데 대한을 쓸필요가 있냐는 의견이 있었는데 신석우 선생이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다시 흥해보자고 했고, 왕정을 뜻하는 제국이 아닌 공화정을 뜻하는 민국으로 바꾸자고하여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탄생하게 됩니다. 


1919.04.11 대한민국 임시 헌장을 채택하고 아래와 같은 정부조직을 갖추고 정부수립을 선포하게 됩니다. (최재형 지사는 블라디보스톡 여행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룰 예정이에요!) 


국무총리-이승만

내무총장-안창호

외무총장-김규식

군무총장-이동휘

재무총장-최재형

법무총장-이시영

교통총장-문창범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 1919.03.17 러시아 연해주에서 대한국민의회 임시정부가 있었고, 1919.04.23 한성임시정부가 수립되었는데 단일정부를 수립하자는 결의하에 1919.09.11 상해 임시정부로 모두 통합됩니다.


<사진1>




상해 임시정부 1호는 김신부로에 첫 보금자리를 마련했으나 일제의 압력과 부족한 재정 때문에 급하게 장소를 옮겨야했습니다. 제1호 임시정부청사인 김신부로 청사는 아직도 어디인지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2) 하비로 청사


미국에서 자금을 모아온 안창호는 프랑스 조계지 내에 마련한 2층짜리 대로변 건물을 이용해 제2호 임시정부청사로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이곳역시 일제의 압력으로 곧 건물이 폐쇄되고 말죠.



현재 하비로 청사의 위치에는 H&M이라는 의류회사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곳이 대한민국 제2호 임시정부청사였다는 소개도 달랑 표지판 하나뿐이라 많은 사람들이 상해를 여행하고 이곳을 지나가도 그냥 옷만 보거나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고 하네요 ㅜㅜ 



3) 마당로 임시정부 청사


하비로 청사가 폐쇄되고 민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1926년 마당로 건물을 구해 1932년 항저우로 임시정부청사를 옮기기 전까지 청사로 사용했는데요. 이곳이 흔히 우리가 머리속에 떠올리는 '상해임시정부'에요.


도착하시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게 크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유적지'라는 글을 볼 수 있어요. 



그리고 안내하는곳으로 들어가면 처음에 여기로 들어가는거 맞나 싶을 정도로 굉장히 외진곳으로 들어가게되요.





그곳을 들어가게되면 임시정부유적지가 있고 입장권 구매후 임시정부내부를 구경할 수 있게 됩니다 (내부촬영은 불가에요!)



참고로 아래 시간말고 휴관일이 따로 있는것 같더라구요. 방문시 꼭 참고하세요!



임시정부안에는 성금을 내고 글을 쓸 수 있도록 해놓은 곳이 있는데요. 저도 그곳에서 큰 돈은 아니지만 적은 돈은 성금으로 내고 글도 써봤어요 (원칙적으로 내부에 사진찍는건 안되는데 거기 있는분한테 이거 종이만 좀 찍을 수 있냐고 물어봤더니 괜찮다고 하시더라구요 ㅎㅎ). 





내부를 돌아보면서 당시 임시정부의 힘들었던 생활을 직접 두 눈으로 볼 수 있었고 독립운동가들이 더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이었어요.



임시정부를 둘러보고 나와서 사진을 찍었는데요. 이때 더욱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서 '우토로 마을' 뱃지를 달고 사진을 찍어 봤어요.








<2. 상해임시정부 초기활동 (1919~1920)>


초기 상해임시정부는 독립신무을 발행하며 각종 외교 선전활동을 펼치고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데 노력을 쏟았어요. 1919.07 임시정부는 '한일관계사료집'을 편찬하여 국제사회에 일제침략의 부담함을 알리려고 했어요. 이듬해 9월 사료집을 완성하여 총 100질을 출판했는데, 그 중 1질이 미국 콜롬비아대학 극동도서관에 완질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고해요.


하지만 상해임시정부 내부 결속력이 탄탄했던건 아니에요. 이동휘는 사회주의를 주장한 반면에 이승만은 자유주의를 주장했고, 이승만 안창호도 본래 기호파 서북파로 내부 갈등이 있었다고해요 (지역갈등이라고 보시면되요). 


1920.12.08일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 취임을 위해 상하이로 들어오자 잠재되었던 내분이 증폭되었고 이승만은 수습이 불가능해질것으로 판단하여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게됩니다.



1) 국민대표회의


1921.06 안창호는 이러한 내부분열을 막고자 모이당에서 국민대표회의의 소집 문제에 대해서 연설하게 됩니다. 당시 모이당은 상하이 한인들에게 집회공간으로 활용되었다고 하네요. 



(목은당은 중국의 문화대혁명 당시 종교적 탄압에도 불구하고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라고 하네요)




이러한 내부분열이 지속되자 1923년 한국의 독립운동 계파간의 민족회의를 열게됩니다. 외교독립론의 이승만, 무장동립론의 박용만, 실력양성론(교육)의 안창호, 기호파, 서북파, 자유민주주의, 사회주의 등 여러 이념을 갖고 있는 지도자들이 모여 회의를 갖게된것이죠.


1923년 1월~6월까지 200여명의 대표가 참석했지만 이곳에서도 임시정부의 처음부터 다시 재건하자는 창조파와 임시정부의 기틀은 유지하되 개혁을 하자는 개조파로 분열되어 통합의 결실을 맺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임시정부 내무총장인 김구는 국민대표회의에 대해 해산 명령을 내리게 되죠.




2) 김구의 등장


지속적인 내부분열로 인해 1925년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탄핵되고, 이후에 대통령으로 임명된 박은식은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바꾸고 사임하게됩니다. 복잡한 인사이동이 진행되던 중에 1927.12 이동녕의 권유로 김구가 국무령에 선출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김구는 내무부를 맡아 임시정부의 실질적인 지도권을 행사하게됩니다.


1920년대에는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대첩 업적도 있었는데요. 이 분들에 대한 소개는 나중에 연변을 여행하게되면 그때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할게요!









이번글에서는 초기 임시정부활동에 대해서 알아보았어요~

다음글에서는 김구체제하의 상해임시정부 활동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할게요!




[사진 래퍼런스]

사진1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90104004002





 

 


안녕하세요~


이번글에서는 3.1 운동이 일어나 후 조직적인 독립운동이 일어나는 문화통치 시기에 대해서 알아볼거에요. 상해임시정부에 대한 내용은 굉장히 많기 때문에 우선 여기에서는 문화통치 시기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과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에 대해서 소개해드릴까해요!



<1. 문화통치>



1) 일본내의 민주주의 운동


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은 전쟁터가 되었지만 미국과 일본은 직간접적으로 전쟁물자를 판매함으로써 점점 자국내의 경제성장률이 커지게 됩니다. 이렇게 자본주의가 발전하자 시민계급이 등장하게되요.  


일본은 당시 민주주의 국가라기 보다는 중앙집권적 군국주의 성향이 매우 강했는데요.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여 공산주의 정권이 세워지자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공산주의 진영을 저지하고자 1918.07.12일 시베리아 출병을 결정했어요 (그런데 사실 자유민주주의 진영으로써 공산주의 막고자했던거 보다는 미국을 도와주고 자신들이 아시아세력으로 나가기 위함이었던거 같아요).


전쟁을 위해서는 쌀이 필요했는데 일본 도야마 현에서는 쌀 도매상들이 쌀을 매점하여 값을 폭등시키자 주민들과 충돌이 일어나게되요. 언론이 이를 보도하려했지만 정부에서 이를 막았고, 예전과는 다른 힘을 갖고 있던 일본자국내 시민계급이 압력을 넣었어요. 그러자 1918.09.21 데라우치 내각이 사퇴하고 하라 다카시가 내각을 조직하게 됩니다.



2) 문화통치의 시작


대한제국에서 3.1운동이 발발하자 조선총독부는 무력운동으로는 대한제국을 제압하는건 무리라고 판단했어요. 또한 일본내 민주주의 운동과 세계2차대전 이후 민족자결주의가 선언되면서 조선총독부는 무력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방향을 바꾸게됩니다.


조선총독부는 대한제국의 언론의 자유, 교육의 자유 등을 부여했어요. 하지만 이 역시 일본의 입맛에 맞는 인사들을 배치함으로써 사실상 자신들의 문화적 요소들을 대한제국에 심어놓으려고 했습니다.


또한 당시 총, 칼을 차고다니면서 위협했던 헌병 경찰제에서 보통 경찰제로 바꾸었지만 경찰 수와 장비는 더욱 강화되어 민족주의 운동을 이전보다 더 심하게 탄압하게 됩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급격한 공업화로 인해 식량부족 문제에 시달렸었는데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대한제국의 쌀 생산량을 증가시키는 산미증식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조달하게되죠. 일본은 대한제국내의 반발을 걱정하여 실제 땅 주인인 지주들에게는 큰 피해가 안가도록 하고, 소작 농민들에게 쌀 생산을 증가시키는데 들어가는 비용을 모두 전가하게 됩니다. 이렇게 식민지 지주제가 심화되어갔죠.


일본은 자신들이 아시아까지 세력을 펼치려면 한반도가 지리적으로 중요했기 때문에 한반도 역시 공업화를 하기위해 여러 준비들을 합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한반도내의 경공업 중소 자본의 투자와 일본 대자본이 들어오게 됩니다.







<2. 의열단>


비폭력 운동인 3.1 운동이 실패하자 독립을 위한 길은 무력항쟁뿐이다라고 주장하는 세력들이 모이게 됩니다. 그리고 약산 김원봉을 단장으로 하는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이 1919.11.09에 설립되게 됩니다.



의열단은 문화통치 시기에 활동한 대표적인 단체인데요. 그들의 활동이력은 아래와 같습니다.


1920 9 14: 박재혁이 부산 경찰서에 들어가 경찰서장을 폭사시켰다.

1920 12 27: 최수봉이 밀양경찰서 소속 모든 경찰이 모인 가운데 폭탄을 투척하였다.

1921 9 12: 김익상이 조선총독부 청사에 들어가 폭탄을 던졌다. 폭발로 청사 일부가 부서졌다.

1922 3 28: 김익상, 이종암, 오성륜이 상해 황포탄 부두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려다 체포되었다. 오성륜 의사는 가까스로 탈옥하고, 김익상 의사는 1943년 처형되었다.

1923 1 12: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1924 1 5: 김지섭이 도쿄의 궁성 정문 앞 이중교에서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하였다.

1924 6 1: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이 친일파 정갑주와 가족을 사살하였다.

1924 6: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이 이토 히로부미 수양녀이자 독립운동가들의 정보를 일본경찰에 넘기던 밀정, 배정자에 대한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함(배정자가 은퇴하게 된 사건임), 친일파 조직인 일진회 이용구 회장 암살 시도중 부상만 입힌 채 실패함

1924 6 7: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이 봉천성 일본 총영사관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불발로 실패, 대서관, 금정관에서 군자금 탈취하다 현장에서 김광추는 총에 맞아 순국, 김병현과 박희광은 체포되었다.

1926 12 28: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습격하였다.



1-2) 상해 황푸강


김원봉은 1922.03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가 상해에 온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어요. 1922.03.23일 오후 다나카 기이치가 지나가자 김익상, 오성륜, 이종암이 권총을 세 차례 쏘았는데 다나카 기이치는 죽지 않고 지나가던 영국 여인만 죽게되었어요. 이 사건은 실패로 끝났지만 의열단은 이때부터 일본조직에 표적이 되기 시작합니다.


황푸강 서쪽에는 와이탄이라는 곳이 있는데요. 당시 중화민국(지금의 대만; '대만'편을 참고해주세요! ㅎㅎ) 은 잇달아 유럽열강과 일본에게 자신들의 영토를 개방했는데요.  



1843년 난징조약으로 상하이가 강제개방되면서 서양인이 상해에 들어오게 되었는데요. 이때부터 외국인들을 위한 구역이 있어야 한다면서 '조계지'라는 곳을 지정해 각 국가마다 상해를 나누어 자신들만의 타운을 만들게 되요.



상해 관청에서는 외국인들을 효율적으로 규제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계지를 내어주는것에 동의했는데요. 특히 와이탄을 내어준이유는 이곳이 농사나 어업에도 적합하지 않은 진흙땅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기술로 1845년 영국 영사관을 시작으로 1930년대 말까지 은행, 무역 회사, 관공서 등 세계 제일의 항구도시로 만들게 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상해 사람들이 조계지 시절을 암흑기로만 여기지 않았는데요. 왜냐하면 이때 여러 문화를 통해 자유로운 사상이 싹튼 중국 최초의 모던시티었기 때문이에요. 보통 상해에서는 이 시기를 '황금시대' 혹은 '올드 상하이'라 하는데, 이를 테마로 한 상점이나 카페도 많이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와이탄에서는 상해의 야경을 볼 수 있는 핫 스팟이 있어요.



와이탄으로 가면 굉장히 볼 것도 많고 살 것도 많지만 그곳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숨결도 느낄 수 있으시다면 더 좋을거에요!








[글 래퍼런스]

https://ko.wikipedia.org/wiki/%EC%9D%98%EC%97%B4%EB%8B%A8

https://news.joins.com/article/20425452

안녕하세요~ 


이번글에서는 일제강점기중에서도 무단통치 시기와 이 시기에 있었던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 알아보려고해요~


여러 독립운동가분들이 계시지만 이곳에서는 상해 임시정부와 관계가 깊은 '안창호', '김구', '이승만'에 대해서 다루려고해요~


아참! 그리고 이글에서는 3.1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에 대한 내용만 다루려고 합니다~! 양이 너무 많아서요 ㅜㅜ




<1. 일본의 대한제국 식민지배>


일본은 근대화 산업을 진행하면서 늘어나는 자국내의 공급량을 소비해줄 곳과 값싼 원료를 공급할 곳이 필요했어요. 


1) 토지조사사업


1910년 일본은 자국 경제를 위해 수출주도산업을 택했어요. 자신들의 상품 단가를 낮추어 무역경쟁력을 키우려고 있는데, 이 당시 상품 단가에 영향을 미치는거이 인건비였어요. 당시 인건비는 쌀과 직간접적인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쌀값을 싸게 사서 자국내 인건비에 보태려고 했어요. 그래서 일본은 조선내 토지조사 사업을 벌이게 됩니다.


1912년에 일본 민법에 기반해 토지조사령을 공포했어요. 그런데 당시 대한제국은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가 있어 지주가 소작인들에게 경작권을 주는 특별한 제도가 있었는데요. 이 토지조사업에서는 소작인들이 가지고 있던 경작권이 부정당했다고해요.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일본인 사유에 의한 대지주가 나타나게 되었고, 대한제국의 토지를 일본 총독부가 관리하게 됩니다. 




2) 회사령


당시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라고 하더라도 자체적으로 자국내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있었어요. 일본은 대한제국의 자본주의 때문에 일본의 물품을 팔 수 없었어요. 그래서 대한제국의 자본주의를 막고자 대한제국에서 회사를 통해 상업적인 활동을 하려한다면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어야 한다는 회사령(1910.12.29)을 실시하게 됩니다.






<2. 1910~1920 독립운동가>


일제강정기이후 독립운동형태는 크게 두 집단으로 나눕니다. 본래 조선말기에 있었던 개화파가 '애국계몽운동'을, 위정척사파가 '무력운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진행하게 되었어요.



1) 안창호(애국계몽운동)




1-1) 미국으로 유학가기전의 생활


1894년 16세때 안창호는 청일전쟁으로 인해 조선이 피해받는 모습을보자 구국의 대열에 합류하려고 다짐했어요. 집안의 반대가 있었지만 삼촌의 도움으로 경성부로 가게됩니다. 이곳에서 장로교 선교사 그랜트 언더우드가 운영하는 보통부에 입학하게 됩되고 산수, 지리, 세계사, 과학 등 여러 학문을 접하게 됩니다. 아마 이러한 교육이 애국계몽운동으로 인도하지 않았나싶어요.


1897년 구세학당 보통부를 졸업하고 다시 조교로 일하게 됐는데요. 그해 고향으로 잠깐 돌아갔을때 할아버지의 뜻대로 이혜련이라는 분과 약혼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 안창호는 이러한 할아버지의 결정에 반기를 들었어요. 그 이유는 이혜련 여사집안이 기독교 집안이 아니였고, 여성이지만 학식이 없다는것을 이유로 들었어요. 하지만 이혜련 여사의 집안에서는 안창호와의 결혼을 위해 집안 모두를 기독교에 입교시켰고 이혜련 역시 정신여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나중에 안창호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는데 이때 이혜련 여사와 이러한 대화를 나누었다고해요.


안창호:"나는 미국에서 더 공부를 하려고 합니다. 10년 후에 돌아와 혼약을 치르겠습니다"

이혜련: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죽으나 사나 당신을 따라가겠습니다"


1897년 서재필, 이승만 등이 주관한 독립협회에 가입하였고, 이승만, 양기탁 등과 함께 만민공동회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하게됩니다. 그러나 황국협회의 무고와 습격으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해산되자 안창호는 고향으로 돌아가게됩니다.





1-2) 결혼 그리고 미국으로의 유학


1902년 결혼을한 안창호는 이혜련 여사와 함께 미국으로 넘어갑니다. 미국으로 가는 뱃길에서 우뚝 솟은 하와이 섬의 웅장한 모습을 보고 자신의 호를 도산(섬 도,메 산)이라고 짓습니다. 미국에 도착하여 본격적인 공부를 하려고 했지만 그곳에서 동포들의 어려운 처지를 본 후 학업을 포기하고 교민지도에 나섰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안창호는 독립운동을 위해 머나먼 여정을 떠나게 되는데 이로인해 가족과는 오랜시간을 보내지 못했다고하네요.


"내가 지금까지 아내에게 치마 하나, 저고리 한 감 사준일이 없었고, 아들 필립에게도 공책 한 권, 연필 한 자루 못 사주었다. 그러한 성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여러가지 사정으로 그랬는데, 여간 죄스럽지 않다"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면서 하우스 보이로 취직해 2~3년 동안 일을했다고해요. 그런데 그곳에서 두 명의 조선인들이 싸우는걸 목격했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상권문제로 서로 싸웠다고 하여 안창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인공립협회'라는 것을 세우게 됩니다.



11월에는 자비를 들여 부지를 마련하여 공립협회 회간을 설립했고 11월 22일 공립신보를 발행해 교민사회에 보급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해 아들 '필립 안'이 태어났다고해요.





1-3) 애국계몽운동시작 (신민회, 서북학회)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안창호는 윤치호, 서재필 등과 함께 을사늑약 반대운동을 주도했어요. 1907년 미국에서 귀국을 결심하고 귀국 즉시 이동휘, 김구, 윤치호, 양기탁, 이회영 등 국내 계몽운동의 핵심인물들을 소집했어요. 그리고 민중 계몽운동을 통해 문맨과 구습을 타파하여 실력을 양성하겠다는 목적으로 '신민회'를 조직하게 됩니다. 그리고 신민회에서는 전국적으로 애국지사들을 규합해나갔고 청년지사들을 교육하는 등 여러 활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민회 강령


민족자존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한다.

함께하는 투쟁동지를 발굴.총력 단결한다.

국민 개개인의 국민운동 역량을 축적한다.

미래의 주인될 청소년 교육을 촉진한다.

각종 상공업을 발전시켜 국민경제의 부흥을 도모한다.


1908년 김좌진, 이갑 등과 함께 장학재단인 서북학회를 창립했어요. 여러 지역을 후원하여 책을 보급하려 노력했고 도자기 회사를 설립하는데 투자하여 산업을 일으키려고 했어요.




1-4) 1차 수감 그리고 흥사단


1909년 10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의 관련자로 지목되어 경성부 용산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으나 혐의가 없어 풀렸났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나중에 하얼빈 여행을 하게되면 그때 자세히 다루도록 할게요!)


일본에서도 안창호의 학식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었고 그를 포섭하면 대한제국을 통치하는데 더 수월할거라 생각해 그에게 내각 조직 제의를 두 번이나 했다고 해요. 물론 모두 거절했지만요. 


안창호는 이때부터 이때부터 북경, 상해, 블라스보스톡 등지를 돌아다니다 그해 8월 소련에서 한일병탄 소식을 접하고 귀국하게 됩니다. 1년 후 북만주로 건나거 무관학교를 세우려했지만 비용문제로 인해 다시 배를타고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 독립운동을 하게 됩니다.


1912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이승만, 박용만, 안창호 등에 의해 '대한인 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가 창설되었고 제2대 회장으로 당선되었어요. 하지만 '대한인 국민회'의 주도권을 놓고 이승만, 박용만과 경쟁하게 되면서 '대한인 국민회'는 안창호파, 이승만파, 박용만파로 다시 나뉘게 됩니다.


1913년 안창호는 '대한인 국민회'와는 별개로 '흥사단'을 찹립하게됩니다. 그리고 '대한인 국민회'의 인가 승인을 받기 위해 노력했고, 캘리포니아 주지사로부터 정식 사단법인 인가를 받았다고 하네요. 이때 샌프란시스코에서 LA로 이주하여 한인사회 활동을 시작하였고 1917년에는 북미 실업주식 회사를 설립했다고 합니다. 또한 주로 캘리포니아, 멕시코, 캐나다 등을 방문하여 독립운동을 하게됩니다.







2) 김구


김창암은 어린시절 과거시험 당시 뇌물을 받고 관직을 파는 관리들의 비리를 보고 서당공부를 그만두고 동학에 입도하게 되었습니다. 동학에 입도할때 자신의 이름을 김창암으로 바꾸었는데요. 아마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이름을 바꾼게 아니었나 싶어요.




동학농민군으로 이름을 널리알리자 당시 동학농민토벌대장 안태훈과 마주하게 되는데요. 안태훈은 적이지만 어린 김창수의 성품을 마음에 들어해 귀순을 권유했다고도해요. 그리고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안태훈은 김창수를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아들인 안중근과 친구의 연의 맺어주게되죠.


김창수도 1905년 을사늑약 반대를 위해 여러활동들을 했는데요. 이러한 활동 중 국민들이 지식이 없고 애국심이 박약하다는 생각을 하여 교육사업 등 애국계몽활동에 전념하기로 결정합니다.


1910년 신민회 회의가 열릴 때 그는 신민회 황해도 지부의 대표자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하게 됩니다. 그해 12월 안정근을 만났다는 이유로 1911년 안악사건의 연루자라고 지명한 조선총독부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형문을 받았고 재판에서 15년형을 선고 받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게 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김좌진과 조우하게 되죠.


서대문형무소에 있으면서 일본의 민적(호적)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바꿔야 겠다는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요. '백'정(白丁), '범'부(凡夫)의 신분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자신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을 이룰거라는 바람에 호를 '백범'이라하고 이름을 '김구'라고 지었닫고 합니다. 


1915년 8월 특별 가출옥하여 1917년 2월 소작인들을 계몽하고 학교를 세우는 등 농민계운동을 다시 전개합니다. 그리고 1918년 상해에서 여운형을 당수로하여 조직된 신한청년당에 참여하게되죠.






3) 이승만


3-1)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분노한 청년


1895년 배재학당이 입학한 이승만은 11월 명성황후가 시해당하자 이에 대한 원수를 갚는다는 계획을 세웠다가 사전에 탄로나 누이집에 피신했어요. 하지만 금방다시 배재학당에 복귀하였고 1896년 서재필의 강의를 듣고 서양사람들에게 호기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1898년 만민공동회 당시 가장 앞장서는 청년으로써 활동했고 서재필은 그에게 미국 유학을 적극 권고하게 됩니다. 그해 11월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도입하려했다는 혐의를 받고 독립협회 임원들이 체포되자 이승만은 배재학당 학생등을 동원해 농성을 펼쳤고 독립협회 간부들을 석방시키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1899년 박영효 일파의 대한제국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다시 체포되어 1904.08.09일까지 한성감옥에 투옥됩니다. 이승만은 옥중 생활에서 성경책을 통해 영어공부를 했으며 민중계몽의식 가치관을 나타내는 저서 '독립정신'을 1904.06월에 저술하게 됩니다.


1904.08월 민영환의 건의로 출옥한 이승만은 민영환에게서 건내 받은 밀서를 소지하고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11월 도미합니다. 미국으로 가기전 고종이 그를 만나 밀지를 전달하려고 했으니 이승만은 나라를 망친 고종과는 대화하고 싶지 않다고하여 거절했습니다.


1905.01.15 워싱턴DC에 도착하여 미국신문 '워싱턴포스트'지와 기자회견을 갖고 일본의 침략이 부당함을 폭로하는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리고 2월 조지워싱턴 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게되죠. 그 달 20일에는 한국에 선교사로 왔던 휴 딘스모어를 찾아갔고 이를 통해 조노 헤이 미국 국무장관가 30분 면담을 하게됩니다. 그리고 이 면담에서 1882년 '한미수호조약'에 따라 한국의 독립에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헤이 장관의 죽음으로 허사가 되었죠.


1905.08월 윌리엄 태프트는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플랭클린 루즈벨트가 아니에요!)의 딸 앨리스과 아시아 수행길에 하와이 호놀룰루를 경유했는데요. 이때 이승만은 호놀룰루의 한인 선교부 와드먼 박사를 통해 태프트와 접촉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윌리엄 태프트에게 추천장을 받아 1905.08.04 루즈벡트 대통령과 이승만이 만나게 됩니다. 민영환에게 받은 밀서를 받고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외교적인 일이므로 워싱턴의 한국 공사관을 통해 제출하라고 권유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한국 공사관은 일본에게 포섭된 상태였는데요. 이승만은 이들을 설득하려했지만 외면당하고 맙니다. 이승만은 한 달뒤 민영환에게 격려 편지와 300달러의 경비를 지원 받았지만 민영환은 을사늑약의 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하게 됩니다.


<사진1. 이승만>


1905년 루즈벨트의 딸 앨리스는 대한제국을 방문하는데 고종의 기대와 달리 미국측은 대한제국에 큰 관심이 없었고, 이후 시어도어 루즈벨트 역시 이승만을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윌리엄 태프트를 통해 일본 총리 가쓰라와 식민지 분할에 합의한 뒤었기 때문이죠. 이것을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라고 합니다.


이후 이승만은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의구심을 품게 되었으나 자신이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실망감을 갖고 미국에 남아 공부를 하기로 결심합니다. 



3-2) 이승만과 박용만의 대립 


이승만은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철학 전공으로 학사 학위를 받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를 1910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게됩니다. 이승만도 노동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충당하면서 어렵게 공부했는데요 그의 처지를 알게된 지도교수로 인해 장학금을 받기도 했죠.


1908년 대한제국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하던 친일파 미국인을 장인환, 전명운 의사가 저격하여 미국 법정에 서게됩니다. 당시 미주 한인들이 이승만에게 전명운의 변호를 맡아줄것을 요구했으나 이승만은 3000달라의 비용을 요구했습니다 (당시 장인환 의사의 미국 변화사 선임비는 4000달러였다고 하네요).


미주 한인들은 여러곳에서 독립지원금을 모아 이승만에게 3000달러를 전달했지만 예수교인으로 살인 재판 통역을 원치않는다고 하고 했어요.


1908.08 미국 콜라라도주에서 개최돈 '애국동지대표자회의'에 이상설과 함께 연해주 대표로 참석했고, 1910.03 '대한인 국민회(애국계몽운동)'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하기 시작했어요. 1910년에는 대한제국으로 돌아가 YMCA 청년부 간사로 취임하여 기독교를 선교하였어요. 


1913년 '대한인 국민회'와 박용만의 초청으로 미국 네브래스카에서 하와이로 건너가 정착생활을 시작했어요. 이승만과 박용만은 한성감옥에서 만나 호형호제 하던사이었습니다. 하와이에서 한인들을 위한 노력을 하던중 1914년 박용만은 국민군단을 창설해 군사력을 양성코자 했으나 이승만은 무장투쟁에 반기를 들고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을 주장했어요.


당시 하와이 한인들은 '대한인 국민회'에 의무금을 납부하였는데요. 이승만은 '대한인 국민회' 회장 선출과 자금 사용내역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였고 '대한인 국민회'측과 대립하게 됩니다.


1918년 박용만은 일본군 선박 출운호를 폭파하려 한다는 혐의를 받고 하와이 법정에 서게 되는데 '신한민보'에 따르면 이승만이 증인으로 참석해 박용만을 비난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박용만의 국민군단은 해체되고 박용만은 하와이를 더났다고 하네요.



3-3) 외교적 수단을 이용하려한 이승만


1918년 11월 세계 1차대전이 끝나고 1919.01.18 파리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 미주의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평화회의에 이승만 박사, 민찬호 목사, 정한경을 파견하려 했지만 그들은 미국 시민이 아니기 때문에 여권을 얻으려면 일본 대사관에서 여권을 받아야 했다.


1918년 제1차 세계 댖던의 종전을 위한 파리 강화회의가 예정되었고 미국 대통령인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하게됩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이승만은 대한제국에 이러한 사실을 알리려 밀지를 보낼 계획을 갖게됩니다. 그 밀지에는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론의 원칙이 정식으로 제출될 이번 강화회의를 이용하여 한민족의 노예생활을 호소하고 자주권을 회복시켜야 한다. 미국에 있는 동지들도 이 구국운동을 추진시키고 있으니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해주기 바란다'라는 내용이 있었는데요. 이승만의 측근이 송진우를 만나 밀서를 전달하려 했지만 나름의 뜻이 있던 송진우는 밀서를 반송시켰습니다.



지금까지 무단통치시절 배경과 그 당시 독립운동가 3인에 대해서 소개를 해드렸어요. 이 3인에 대해서 소개해드린 이유는 나중에 상해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에요!



물론 안중근, 이회영, 최재형 등 훌륭한 독립운동가 분들이 계시지만 이 분들은 나중에 '하얼빈', '블라디보스톡'여행을 하게 되면 더 자세하게 다루도록 할게요! 


다음글에서는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되는 3.1 운동과 상해임시정부에 대한 글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글 래퍼런스]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7955031&memberNo=38753951


[사진 래퍼런스]

사진1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8A%B9%EB%A7%8C

안녕하세요~


이번글에서는 일본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침략을 시작하게된 제물포조약, 갑신정변 부터 ~까지(일어나는 조선이 격변하는 시기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1. 제물포 조약과 갑신정변 그리고 부정부패>


임오군란으로 일본은 피해보상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반적인 상식선에서의 보상수준이 아닌 일본군대를 궁안에 배치하라는 요구조항이 문제가 되었죠. 하지만 청나라 군대가 임오군란(1882)을 수습한 후 조선에 더욱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어요. 당시 청나라 주재로 있었던 위안스카이(홍콩편에서 언급한바 있죠?ㅎㅎ)가 내정간섭을 심하게 하게됩니다.


또한 고종 곁에서 개화를 주장하는 두 집단(민씨(명성황후)세력의 개화파 VS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의 급진개화파)이 있었어요. 하지만 두 집단간에는 방향성의 차이가 있었어요. 급진개화파였던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은 아편전쟁을 통해 몰락한 청나라보다 일본식 근대화를 이루어 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그렇게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의 급진 개화파는 일본의 도움을 받아 청나라를 몰아내려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런데 당시까지만해도 일본은 조선에 무력으로 침략할 생각은 없었다고해요.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은 일본의 문명개화의 중심인물인 후지카와 유키치라는 인물을 찾아가 자문을 구하게 됩니다.


<사진1. 후지카와 유키치>


후지카와 유키치라는 인물은 처음에 조선에게 굉장히 우호적인 자세를 취했어요. 조선 또한 일본이 개화하기 전의 상태와 비슷하다고 보았고 조선의 개혁을 적극지원하자고 주장했어요. 당시 정한론(한국을 정벌하자)을 주장하던 군국주의자들의 주장을 묵살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그리고 일본세력은 '갑신정변(1884)'을 일으켰는데요. 당시 민씨(명성황후)세력이 청나라의 위안스카이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위안스카이는 군사를 이끌고 창덕궁을 공격하기 시작했어요. 문제는 급진개화파를 도와주려고 했던 일본세력이 약속을 저벼리고 물러나게되면서 갑신정변은 3일만에 마무리되었어요. 그래서 이를 3일천하라고해요.


급진 개화파를 지지했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후에 조선의 멸망을 바란다는 태도를 취했다고 합니다 (아니 약속안 지킨건 그쪽인데 왜....)


아무튼 이후에 일본은 임오군란때처럼 비슷한 핑계로 보상을 요구하게 되었고, 청나라의 간섭도 심화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조선의 주권은 약해져갔는데요. 1885년 일본과 청나라는 '텐진조약'에 따라 청나라의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면 일본의 군대도 조선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합니다.








<2. 제1차 동학농민운동 그리고 김구의 등장>


백성들은 '텐진조약'을 통해 조선 정부에 무능함을 보게되었어요. 조선 관리들은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하려는 노력을 보이기는 커녕 자신들의 안위를 챙기고자 부정부패를 일삼기 시작했어요. 대표적인 예로, 곡창지대인 전라도 쌀들을 조선관리들이 더 많이 가져가고 있었답니다. 


당시 청나라에도 서양세력에 의해 서학(천주교; Catholic)이 퍼지고 있었어요. 조선에서는 본래 유교, 불교, 선교 (삼교)에 기반을 두고 있었는데, 최제우는 서학에 대항하고자 삼교를 통합시킨 동학(인내천 사상)을 창시하게 됩니다. 그리고 조선관리의 부패를 보고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동학'에 기반을 둔 농민 '전봉준'과 함께 1894년 1월 전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신임군수의 회유에 의해 동학농민군은 스스로 해산하지만 한양에서 내려온 정부관료가 민란관련자를 혹독하게 탄압하게 됩니다. 그러자 1894년 최제우를 중심으로 한 동학 지도자들과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동학농민군이 다시 한 번 집결하게 됩니다. 이때는 전국적으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당시 황해도 동학 대표자로써 김창수라는 인물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훗날 김창수라는 인물을 김구라고 부르게 되죠.


동학농민군은 생각외로 정부군을 차례대로 격파하면서 기세를 올리게 됩니다.








<3. 일본의 본격적인 침입시작>



1) 일본의 경복궁 습격 (1894.6.21) 그리고 청일전쟁


고종은 동학농민군에게 패하게 되자 수습을 위해 또;;; 청나라 군대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텐진조약'에 따라서 일본군도 들어오게 되었어요. 


동학농민군은 외세가 간섭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정부와 빠르게 합의했어요. 이로인해 원칙적으로 청나라군대와 일본군대는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청나라 달리 일본군은 자신들의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어요. 그 이유는 아직 동학농민운동이 끝나지 않았다고 스스로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에요 (아니.. 도대체 끝났다는데 뭐라는건지 .....).


하지만 실제 의도는 조선을 개혁하기 위함이었어요. 하지만 일본측도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청나라 군대도 계속 조선에 주둔하고 있었어야 동학농민운동이 끝나지 않았다는 대의명분을 만들 수 있어 청나라에게 같이 조선에 군대를 두어 조선을 개혁하자고 했어요. 하지만 청나라는 그건 조선이 알아서 할 거라며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일본은 태도를 급격하게 바꾸어 (아니 얘네들은 왜 이렇게 명분을 바꾸는걸 좋아하는거야;; 거짓말 하는걸 좋아하는건지 신의같은건 원래 없는건지;;) 1894.6.21일 기습적으로 경복궁을 점령했고 고종에게 청과 맺은 모든 조약을 파기하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러자 1894.7.25일 9개월 전쟁기간의 서막인  청일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일본의 승리로 마감됩니다.




2) 2차 동학농민 운동(1894.9.18) 그리고 갑오개혁


당연히 청나라가 이길거라고 생각했던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나게 되자 조선뿐만 아니라 세계가 충격에 빠지게 되었어요. 조선정부는 그 어떤 조치를 취하지 못했지만 오히려 민초들이 일본에 대항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해요. 


조정에게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시키는것보다 일본의 침략을 막는것이 먼저라고 판단한 동학농민군은 1894.9.18 2차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하지만 한양으로 북상하는 도중 1894.11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정부군까지 합세한 공격을 받아 대패하게되요 (우금치 전투). (정말 정부관료들은 뭘한건지... 가진거 없는 민초들도 나라를 지키겠다고 나서는데..)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청나라로부터 조선의 실질적인 지배권을 빼았게 되었어요.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한 급진 개화파들이 일본의 위세를 얻고 다시 조선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조선의 근대화하려는 갑오개혁을 실시하게 됩니다.


갑오개혁은 총 3차례의 개혁으로 나뉘는데, 1차 갑오개혁, 2차 갑오개혁, 3차 갑오개혁(을미개혁)을 통해 '신분제(노비제)'의 폐지, 인신 매매 금지, 조혼 금지, 과부의 재가 허용, 고문과 연좌법 폐지, 은본위제 등 조선의 봉건적 폐습을 없애고 근대적 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했어요. 



이 부분에서 갑오개혁에 대한 제 개인적인 생각을 써보려고해요.


갑오개혁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오가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갑오개혁 자체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봉건적 세습이 폐지되고 이 나라가 근대화를 이루는 기틀을 마련했기 때문이에요. 그렇다고 일본의 침략이 정당하다고 말하는건 '절대' 아니에요! 일본이 조선에 간섭하지 않고 처음부터 청나라 땅에서 자기들끼리 전쟁하고 이겼으면 조선도 일본의 힘을 인정했을거고, 일본의 근대화를 배우려는 움직임이 컸을거에요. 그렇게 조선은 일본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며 많은 교류를 진행했을거고 양국간의 역사는 지금과 180도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을거에요.  






<4. 러시아의 등장 그리고 아관파천>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조선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점점 넓혀가기 시작했어요.



기세등등한 일본은 조선을 지나 요동을 점령하고 만주까지 점령하려고 했는데요. 당시 청나라에 영향력을 펼치고 있던 유럽국가들은 일본이 커지는 것을 막고자했어요. 러시아와 그 외 유럽국가들은 일본에게 청나라에 요동을 반환할 것을 요구했고 일본도 아직까지는 자신들의 힘이 유럽국가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하여 반환요구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사진2>


일본이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자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이용해 일본을 견제하려고 했어요. 그렇게 조선정부는 친러세력으로 바뀌고 있었어요. 하지만 일본은 조선내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이 감소되는것을 막기위해 친러세력의 중심인물인 명성황후를 시해하게 됩니다. 이를 을미사변(1895)이라고해요. 




고종은 자신도 살해위험을 느껴 1896~1897년 러시아 공사로 피신하게 되는데 이를 아관파천이라고 합니다.







<5. 대한제국의 탄생과 러일전쟁>


고증은 1987년 조선에 복귀하자마자 세로운 조선을 만들고자 하는 이념으로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게 됩니다. '대한'이라는 이름은 10세기의 후 삼국 시대의 후고구려, 후백제, 신라를 가리키는 마한, 진한, 변한 (삼한)에서 유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삼한이 통일되었다는 의미에서 대한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하네요. 그리고 국호를 변경하면서 제국이라고 선포했기 때문에 대한제국이라고 불렸다고해요. ('대한민국'의 대한도 여기서 유래가 되었다고해요)


명성황후가 훗날 평판이 좋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당시 백성들에게는 국모가 시해당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반발심이 극에 달해있었어요. 고종이 조선에 돌아오고 친러세력이 자리를 잡게되자 갑오개혁 중심 인물들이 백성들에게 살해되거나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합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영국과 러시아의 세력다툼이 진행되고 있었는데요. 러시아는 만주와 대한제국으로 세를 확장하길 원했고, 영국과 일본은 러시아가 세력이 확장되는것을 원치않았어요. 그래서 1902년 영일동맹을 맺게됩니다. 당시 러시아 군대는 모스크바쪽에 전선을 펼치고 있었는데, 시베리아횡단철도가 아직 완공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대한제국까지 당도하려면 시간이 걸렸다고해요. 그래서 일본은 철도가 완공되기전에 먼저 선제공격을 감하게 되었고 이렇게 1904.02 러일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6. 한일의정서와 헤이그 특사>


러일전쟁을 시작하고 일본은 재빨리 대한제국에 들어와 강제로 한일의정서(1904.02)를 체결하게됩니다. 한일의정서에는 대한제국의 군사기지 사용권과 여러 요구사항들이 포함되어 있었어요. 또한 그해 8월에 제1차 한일협약이 이루어지게 되고, 스티븐스라는 미국인이 대한 제국에 (외교) 고문관으로 오게 되고, 일본의 메가타라는 사람이 재정고문으로 오게됩니다.


러시아의 영토가 확장되는 것을 경계하던 일본, 미국, 영국은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재정적인 도움을 주면서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이끌게 됩니다 (이때 일본이 러시아와 해전에서 이길 수 있었던 이유도 영국에서 중간에 지속적인 방해를 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나오더라구요).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1905년 대한제국의 화폐정리사업을 통해 대한제국의 화폐를 일본의 화폐로 바꿔버리는 만행을 저지르면서 본격적으로 대한제국의 경제까지 침범하게 됩니다.



사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조금만 더 전쟁을 지속했으면 일본을 이겼을 것이라는 평이 있어요. 그런데 이때 미국이 제 빨리 러시아와 일본을 중재하게 되었고 러시아, 미국, 일본 세 나라는 일본의 대한제국 지도 보호를 승인하는 포츠머스 조약을 맺게 됩니다.


그리고 일본은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아 러일전쟁에서의 손실을 메우려고 했죠. 이토 히로부미를 중심으로 제2차 한일협약을 맺게되었는데요. 이때 이완용, 이근택, 이재용, 박제준, 권중현이 한일협약에 참가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것에 동의를 하게 됩니다. 그 후 우리는 이들을 을사년 늑약 (을사늑약)에 참가한 5명의 인물들을 을사오적이라고 부르게되죠. 결국, 1905년 대한제국은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을 통해 일본에 의해 외교권까지 박탈당하게 됩니다. 



<사진3. 을사오적>


을사조약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가 제1대 통감으로 대한제국에 들어오게 되는데요. 제2차 한일협약이 있은 후 대한제국에서도 이러한 사태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2년뒤 헤이그 특사를 보내 일본의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알리려고 했는데요 (헤이그 특사는 나중에 블라디보스톡 편에서 더 자세히 다룰게요~). 하지만, 일본의 로비로 인해 헤이그 특사들이 이루고자했던 목적달성은 실패하게 되고,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일본은 고종을 강제퇴위 시킵니다.








<7. 기유각서 그리고 일제강점기 시작>


고종위 강제퇴위되고 1907.07 한일신협약(정미7늑약)을 체결함으로써 일본 통감의 권한을 한층 강화시켰습니다. 일본 통감은 이때부터 대한제국의 차관급 임명권을 갖게되어 대한제국의 정치권까지 손에 넣게 됩니다. 


제1대 이토 히로부미를 시작으로 제2대 통감 소네 아라스케 (1909), 제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 (1910)까지 이어지게되고,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이완용과 함께 1910.8.29일 대한제국의 국권피탈을 의미하는 문서에 도장을 찍게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조약을 한일병탄조약이라고 부르고 이 날을 경술국치의 날로써 기억하게 됩니다.


이렇게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답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이후 한반도를 다스리는 조선 총독부의 초대총독이 됩니다. 즉, 1905~1910년에는 통감부가 있었다면, 일제강점기인 1910~1945년에는 총독부가 한반도를 지배하게되죠. 





이번장에서는 일제강점기가 일어나기 직전까지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았어요. 다음글에서는 3.1 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일제강점기에 대한 글을 써보도록 할게요!






 

[사진 래퍼런스]

사진1

https://ko.wikipedia.org/wiki/%ED%9B%84%EC%BF%A0%EC%9E%90%EC%99%80_%EC%9C%A0%ED%82%A4%EC%B9%98#%EC%83%9D%EC%95%A0_%ED%9B%84%EB%B0%98

사진2

https://hansemm.tistory.com/277

사진3

https://learningnara.tistory.com/entry/%EC%9D%84%EC%82%AC%EC%98%A4%EC%A0%81-%ED%9B%84%EC%86%90-%EC%95%84%EC%A7%81%EB%8F%84-%EC%9E%98-%EB%A8%B9%EA%B3%A0-%EC%9E%98%EC%82%AC%EB%82%98



안녕하세요~ 


이번글에서는 메이지 유신 이후부터 일본의 침략이 시작되기 직전까지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설명해드리려고해요~




<1. 메이지 유신과 정한론, 그리고 강화도 조약>


당시 조선에서는 흥선 대원군이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요. 일본은 자신들이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세운 신정부 (사쓰마 번, 조슈 번 중심)의 개국을 알림과 동시에 조선과 국교 교섭을 시도했지만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발목을 잡히게 됐어요 (국교를 거절한 이유는 쇄국정책 이외에 다른 이유들도 있었다고는 합니다). 


하지만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는 시기(1873)에 맞춰서 다시 조선과 수교를 하려고 준비하였고, 1875년 9월 자신들의 군함인 운요호를 이끌고 강화도에 접근합니다. 조선군이 물러나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접근하자 조선군과 무력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때 운요호라는 군함도 조슈 번이 영국에서 구매한 배라고 하네요;;) 


1876년 일본은 이러한 부분을 문제삼고 군함 5척을 이끌고 강화도에 왔어요. 그리고 조약을 요구하면서 사건을 마무리 짓고자 했어요. 당시 청나라만 보더라도 계속해서 조약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세계 정세가 조약을 맺는 쪽으로 가는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고종의 적극적인 개항의지,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의 개항 권고, 흥선대원군의 반대세력에 의해 조약을 맺는 쪽으로 방향이 흘러가게 됩니다. 그래서 근대 국제법에 따른 조선과 일본의 최초의 수교(조약)인 강화도 조약이 맺어지게 됩니다.   









<2. 조선의 개화 그리고 임오군란>


강화도 조약으로 인해 조선이 개항이되자 일본의 도움을 받아 여러 서양세력들이 조선에 조약을 맺는 조건으로 개항을 요구하게 되었어요.


당시 유럽 또한 자신들끼리 치열하게 영토전쟁을 하고 있었는데요. 영국과 우호적인 미국은 일본, 조선, 청나라가 서로 연합을 하여 러시아를 견제해주길 바랬어요.

 

고종은 개화의 적극적인 의지를 보였고 개화파 인물들 (김옥균, 홍영식, 서재필)과 함께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어요. 그래서 조선에서도 서양문물을 통한 신식군대인 '별기군'이 창설됐는데, 별기군은 미국의 군대교육훈력을 받은 일본인 교관이 지도하는 군대였어요. 그런데 문제는 일본식 '별기군'과 조선식 '구식 군대'간의 차별(월급, 음식)이 발생하게 되었고, 잠시 세력이 주춤했던 흥선대원군 세력과 위정척사(세울 위, 바를 정, 배척할 척, 사악할 사=외세)파세력이 조선식 '구식 군대'편에 서게되었어요.




그리고 1882년 임오군란을 일으켜 개화세력인 민씨(명성황후)세력을 제거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민씨세력은 청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때 청나라 북양대신인 리홍장의 명령에 따라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들어와 흥선대원군과 위정척사파 세력을 무력화시켰어요 (이후 흥선대원군은 톈진으로 끌려갔다고 해요). 


민씨세력이 다시 조선의 집권세력이 되자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들도 조정의 중책을 맡게 됐어요. 그리고 임오군란의 진압을 축하하기 위해서 과거 시험이 열리는데 여기서 이완용, 서재필 등이 출사하는 계기가 됐답니다.




 

 

<4. 조미수호통상조약(1882)과 조선국기의 탄생>


일본이 조선에 세력을 넓혀가자 청나라 북양대신 리홍장은 조선의 종주국 노릇을 하기 위해 서양세력들에게 자신들이 조선과 수교하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했어요. 미국정부의 명을 받은 슈펠트는 리홍장에게 조선과의 수교를 알선해주기를 부탁하였고 이를 통해 수호통상조약을 맺을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조약을 체결하기전 미국은 조선에게 국기를 제정할 것을 요구했어요. 원래 조선은 국왕을 상징하는 어기를 쓰고 있었어요. 


<사진1. 조선의 어기, 태극팔괘도>


그런데 1880년 청나라에서 조선이 독립국가이면 국기가 있어야 한다면서 국기를 디자인해주었는데 그 국기가 '청룡기'라고 해요. 문제는 청나라에서 제안한 국기 디자인이 청나라의 국기인 '황룡기'의 도안에 착안하여 동쪽을 의미하는 색인 청색과 황룡기보다 적은 용의 발의 수를 제시하는 '청룡기'를 제시함으로써 조선의 청나라의 속국임을 나타내려 했다고 합니다.


<사진2. 조선 청룡기>


<사진3. 청나라 황룡기>


그런데 슈펠트 제독이 조선이 청나라와 비슷한 국기를 사용한다면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해, 조선에게 '국기를 제정해 조인식에 사용할 것'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 고정의 명을 받아 태극기를 제작하게 되었고 1883년 3월 6일 정식으로 '조선국기'로 채택이 되었습니다.


<사진4. 조선의 국기>


<사진5. 조선 국기의 변천과정>



지금까지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기 직전까지의 역사를 살펴보았어요. 다음글에서는 일본의 무력침입이 시작되는 사건들에 대해서 정리해볼게요!





[사진 래퍼런스]

사진1

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D%95%9C%EB%AF%BC%EA%B5%AD%EC%9D%98_%EA%B5%AD%EA%B8%B0

사진2

http://www.doopedia.co.kr/photobox/comm/community.do?_method=print&GAL_IDX=170715001067954

사진3

https://ko.wikipedia.org/wiki/%EC%B2%AD%EB%82%98%EB%9D%BC

사진4,5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A%B5%AD%EC%9D%98_%EA%B5%AD%EA%B8%B0

안녕하세요~


이번글에서는 일제강점기를 다루기에 앞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이유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할거에요~


해외여행 '홍콩', '대만'편에서 대항해시대가 열리고 제국주의가 시작되었던 것을 설명드린바있죠? 서쪽에서는 청나라가 영국에 침략을 당한 한편 동쪽의 일본은 미국에게 침략을 받았답니다.





<1. 에도 막부시대 (1603~1868)>


당시 일본의 정치체제는 지금의 영국 정치체제와 닮았다고 보시면돼요. 1598년 임진왜란을 끝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세력이 몰락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의 정권을 잡게되었어요 (당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에게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다고 합니다). 당시 일왕의 존재가 있었고 막부라는 중앙집권세력과 다이묘라는 지방자치세력들이 있는데, 중앙집권 세력인 막부의 힘이 굉장히 막강했고 일왕의 힘은 이들에 미치지 못했어요. 하지만 일왕도 다이묘(지방영주)세력들과 같이 막부세력을 견제하기도 했다고 하네요.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력은 에도 막부라고 불리웠는데요 1603~1868년도 까지 에도 막부가 정치세력을 잡으면서 조선과도 큰 문제 없이 지네왔어요. 하지만 이런 평화로운 분위기는 아래의 인물이 등장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게 됩니다.


<사진1. 페리제독>




<2. 일본의 개항>


1853년 미국 페리 제독은 군함을 이끌고 에도(도쿄)에 도착하게 됩니다. 당시 에도 막부세력은 청나라가 영국에게 아편전쟁을 통해 크게 패한것을 알고 있던터라 미국에게 크게 대항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1854년 3월 '미일화친조약'을 맺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일왕에게는 알리지 않았다고 해요. 


그런데 당시 에도 막부세력도 지금과 같은 상황은 자신들끼리 해결하지 못할거라고 판단하여 일왕과 다이묘(지방영주)에게 도움을 청하게 돼요. 그래서 일왕세력인 다이묘(지방영주)들은 에도 막부세력에게 일왕의 허락을 받으라고 이야기합니다.


일왕은 이러한 조약을 단칼에 거절하라고 했지만, 2차 아편전쟁에서 또 영국이 이기자 미국 해리스 영사는 더욱 압박을 가했고 어쩔 수 없이 일왕의 허락없이 '미일수호통상 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전쟁없이 그냥 자동으로 열어준 셈인거죠)

 


(미스터 선샤인에서도 일본이 쉽게 개항했다는 대사가 나오는데 위와 같은 사실을 알고 다시 들으시면 다르게 느껴지실거에요 ㅎ)


이러한 에도 막부의 무능함을 보고 서남쪽 (도자마)다이묘들이 반기를 들게 됩니다. 이들은 일왕을 중심으로 '존양양이 (왕을 높이고 서양 오랑캐를 물리친다)'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교토로 집결하게 되었고, 결국 에도 막부 세력을 무너뜨리게 됩니다.





<3. 싸쓰마 번 (가고시마현)과 조슈 번 (야마구치 현)>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인물과 그의 세력인 에도 막부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인식되는 반면에,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등장한 싸쓰마 번과 조슈 번은 아직까지도 부정적으로 인식이 되고 있어요.


<사진2>



'존왕양이 (일왕을 높이고 서양세력을 물리치자)' 운동은 오래가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어요. 왜냐하면 몇번의 출동에서 자신들의 힘이 전혀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존왕양이'->'존왕'으로 바꾸고 서양세력의 문물을 받아드리자고 변심하게 됩니다. 이럴거면 왜 에도막부 세력을 처단했는지... 참 당시 일왕이나 싸쓰마 번, 조슈 번이나 도찐개찐인거 같아요... 

 


 

 

<4 메이지 유신의 시작(1868) 그리고 정한론의 등장>


개화파인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을 중심으로 일본은 근대화에 접어들게 됩니다. 에도의 이름을 도쿄로 변경하고 신분제도 폐지했어요. 지방 번을 폐지하면서 중앙 집권 체제를 수립하여 정치체제를 구축하게 되었고 서양 문물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력이 커지는 일본 내부에서도 잊혀지는 존재들이 있었는데요. 바로 사무라이(무사) 집단이었어요. 일본에서도 신식 군대가 들어오고나서부터 사무라이(무사) 집단들은 무시를 당하게 되었어요. 그러자 1873년 싸쓰마 번의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러한 사무라이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조선을 침략해야 한다는 '정한론'을 주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오쿠보 도시미치가 일본의 성장과 개혁이 우선이라면서 다카모리를 비롯한 '정한파' 인물들의 주장을 반대했습니다.





지금까지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기 전 일본의 역사에 대해서 간단하게 살펴보았어요. 에도 막부 세력이 등장하면서 조선에도 평화가 찾아왔지만 사쓰마 번 조슈 번의 등장으로 다시 한 번 위기가 찾아오게 되요.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은 자신들이 세운 대의명분도 쉽게 바꿔가면서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는데요 (오히려 개항은 에도 막부세력이 하려고 했어요 ㅜㅜ).


이러한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등장은 계속해서 한반도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사진3. 요시다 쇼인; 정한론 주장; 조슈 번>


<사진4. 이토 히로부미; 요시다 쇼인의 제자; 조선통감부; 조슈 번>


<사진5. 아베신조; 요시다 쇼인을 제일 존경한다고 함; 조슈 번; 평화헌법 개정 시도 중>








[사진 레퍼런스]
사진1
사진2

사진3

https://ko.wikipedia.org/wiki/%EC%9A%94%EC%8B%9C%EB%8B%A4_%EC%87%BC%EC%9D%B8

사진4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D%86%A0_%ED%9E%88%EB%A1%9C%EB%B6%80%EB%AF%B8

사진5

https://namu.wiki/w/%EC%95%84%EB%B2%A0%20%EC%8B%A0%EC%A1%B0

안녕하세요~ 시간여행자에요!



지난글들을 보며 홍콩이 왜 중국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죠? 그렇다면 다시 한 번 홍콩에서 일어난 2번의 시위(2014, 2019)에 대한 인터뷰를 들어 볼게요.






홍콩이 지키고 싶은 것이 '민주주의'일까요? '한족의 정체성'일까요? '과거의 향수'일까요? 


홍콩여행을 하면서 느꼈던 것은 '복잡함'이었어요. 복잡하다는 뜻이 긍정적으로 들리는 단어는 아니지만 홍콩의 역사도 그렇고, 홍콩의 거리를 거닐면서도 그렇고, 굉장히 다양한 인종들이 섞여 사는것도 그렇고 모든 것이 복잡해보이는 곳이었어요.

최근의 시위까지 홍콩은 더욱더 복잡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는데요. 홍콩의 미래는 과연 어떻게 될까요?
여행을 마치면서 던지는 질문 또한 복잡했답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건 모두가 홍콩의 평화를 원한다는 점이에요. 그렇기때문에 저 또한 홍콩시민들이 원하는대로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끝으로 이번 여행은 마무리하도록 할게요!



(마지막으로 홍콩시위에 대한 추가적인 내용들에 대해서 잘 만들어 놓은 영상이 있어 올려놓도록 할게요ㅎㅎ)




다음 홍콩여행을 갈 때에는 완차이와 구룡반도의 침사추이 지역을 가려고 해요ㅎㅎ  

아! 맞다! 그리고 제가 공부하고 있는 딥러닝분야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져있는 '홍콩과기대'도 꼭 방문해 보려고 합니다 ㅎㅎ


지금까지 홍콩편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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