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번글에서는 지난번에 이어 문화통치 시기에 일어났던 독립운동에 대해서 알아보려고해요!

지난글에서는 의열단에 알아보았으니 이번글에서는 '상해임시정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왜 하필 상해인가?>


상해는 일본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의 조계지가 있어 일본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있었어요. 그리고 독립지사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우호적인 프랑스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 조계지에서 주로 거주를 했답니다. (왜 프랑스가 우호적이었는지는 여기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제3호 임시정부는 상해 조계지와 가까워요. 조계지 근처에는 아름다운 카페도 많으니 천천히 둘러보시면 좋을것 같아요!)



3.1 운동 직후 국민들을 대표할 조직의 필요성을 인지했으나 당시 순종이 건재하고 있어 망설이고 있었어요. 하지만 조선총독부에 맞서 민족의 망명정부를 조직해야 한다고 판단한 민족지도자들은 임시정부를 수립할 계획을 갖게 됩니다.




1) 1호 임시정부 청사, 김신부로


1919.04.10 상해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에서 지역 교포들과 신한청년당이 주축이 되어 29인의 임시의정원 제헌의원이 모여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정하게 됩니다. 이때 대한제국으로 망했는데 대한을 쓸필요가 있냐는 의견이 있었는데 신석우 선생이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다시 흥해보자고 했고, 왕정을 뜻하는 제국이 아닌 공화정을 뜻하는 민국으로 바꾸자고하여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탄생하게 됩니다. 


1919.04.11 대한민국 임시 헌장을 채택하고 아래와 같은 정부조직을 갖추고 정부수립을 선포하게 됩니다. (최재형 지사는 블라디보스톡 여행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룰 예정이에요!) 


국무총리-이승만

내무총장-안창호

외무총장-김규식

군무총장-이동휘

재무총장-최재형

법무총장-이시영

교통총장-문창범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 1919.03.17 러시아 연해주에서 대한국민의회 임시정부가 있었고, 1919.04.23 한성임시정부가 수립되었는데 단일정부를 수립하자는 결의하에 1919.09.11 상해 임시정부로 모두 통합됩니다.


<사진1>




상해 임시정부 1호는 김신부로에 첫 보금자리를 마련했으나 일제의 압력과 부족한 재정 때문에 급하게 장소를 옮겨야했습니다. 제1호 임시정부청사인 김신부로 청사는 아직도 어디인지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2) 하비로 청사


미국에서 자금을 모아온 안창호는 프랑스 조계지 내에 마련한 2층짜리 대로변 건물을 이용해 제2호 임시정부청사로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이곳역시 일제의 압력으로 곧 건물이 폐쇄되고 말죠.



현재 하비로 청사의 위치에는 H&M이라는 의류회사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곳이 대한민국 제2호 임시정부청사였다는 소개도 달랑 표지판 하나뿐이라 많은 사람들이 상해를 여행하고 이곳을 지나가도 그냥 옷만 보거나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고 하네요 ㅜㅜ 



3) 마당로 임시정부 청사


하비로 청사가 폐쇄되고 민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1926년 마당로 건물을 구해 1932년 항저우로 임시정부청사를 옮기기 전까지 청사로 사용했는데요. 이곳이 흔히 우리가 머리속에 떠올리는 '상해임시정부'에요.


도착하시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게 크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유적지'라는 글을 볼 수 있어요. 



그리고 안내하는곳으로 들어가면 처음에 여기로 들어가는거 맞나 싶을 정도로 굉장히 외진곳으로 들어가게되요.





그곳을 들어가게되면 임시정부유적지가 있고 입장권 구매후 임시정부내부를 구경할 수 있게 됩니다 (내부촬영은 불가에요!)



참고로 아래 시간말고 휴관일이 따로 있는것 같더라구요. 방문시 꼭 참고하세요!



임시정부안에는 성금을 내고 글을 쓸 수 있도록 해놓은 곳이 있는데요. 저도 그곳에서 큰 돈은 아니지만 적은 돈은 성금으로 내고 글도 써봤어요 (원칙적으로 내부에 사진찍는건 안되는데 거기 있는분한테 이거 종이만 좀 찍을 수 있냐고 물어봤더니 괜찮다고 하시더라구요 ㅎㅎ). 





내부를 돌아보면서 당시 임시정부의 힘들었던 생활을 직접 두 눈으로 볼 수 있었고 독립운동가들이 더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이었어요.



임시정부를 둘러보고 나와서 사진을 찍었는데요. 이때 더욱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서 '우토로 마을' 뱃지를 달고 사진을 찍어 봤어요.








<2. 상해임시정부 초기활동 (1919~1920)>


초기 상해임시정부는 독립신무을 발행하며 각종 외교 선전활동을 펼치고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데 노력을 쏟았어요. 1919.07 임시정부는 '한일관계사료집'을 편찬하여 국제사회에 일제침략의 부담함을 알리려고 했어요. 이듬해 9월 사료집을 완성하여 총 100질을 출판했는데, 그 중 1질이 미국 콜롬비아대학 극동도서관에 완질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고해요.


하지만 상해임시정부 내부 결속력이 탄탄했던건 아니에요. 이동휘는 사회주의를 주장한 반면에 이승만은 자유주의를 주장했고, 이승만 안창호도 본래 기호파 서북파로 내부 갈등이 있었다고해요 (지역갈등이라고 보시면되요). 


1920.12.08일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 취임을 위해 상하이로 들어오자 잠재되었던 내분이 증폭되었고 이승만은 수습이 불가능해질것으로 판단하여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게됩니다.



1) 국민대표회의


1921.06 안창호는 이러한 내부분열을 막고자 모이당에서 국민대표회의의 소집 문제에 대해서 연설하게 됩니다. 당시 모이당은 상하이 한인들에게 집회공간으로 활용되었다고 하네요. 



(목은당은 중국의 문화대혁명 당시 종교적 탄압에도 불구하고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라고 하네요)




이러한 내부분열이 지속되자 1923년 한국의 독립운동 계파간의 민족회의를 열게됩니다. 외교독립론의 이승만, 무장동립론의 박용만, 실력양성론(교육)의 안창호, 기호파, 서북파, 자유민주주의, 사회주의 등 여러 이념을 갖고 있는 지도자들이 모여 회의를 갖게된것이죠.


1923년 1월~6월까지 200여명의 대표가 참석했지만 이곳에서도 임시정부의 처음부터 다시 재건하자는 창조파와 임시정부의 기틀은 유지하되 개혁을 하자는 개조파로 분열되어 통합의 결실을 맺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임시정부 내무총장인 김구는 국민대표회의에 대해 해산 명령을 내리게 되죠.




2) 김구의 등장


지속적인 내부분열로 인해 1925년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탄핵되고, 이후에 대통령으로 임명된 박은식은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바꾸고 사임하게됩니다. 복잡한 인사이동이 진행되던 중에 1927.12 이동녕의 권유로 김구가 국무령에 선출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김구는 내무부를 맡아 임시정부의 실질적인 지도권을 행사하게됩니다.


1920년대에는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대첩 업적도 있었는데요. 이 분들에 대한 소개는 나중에 연변을 여행하게되면 그때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할게요!









이번글에서는 초기 임시정부활동에 대해서 알아보았어요~

다음글에서는 김구체제하의 상해임시정부 활동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할게요!




[사진 래퍼런스]

사진1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90104004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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