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번글에서는 민족말살정책을 통해 대한제국을 탄압하려했던 마지막 일제강점기 시기에 대한 글을 쓰려고해요!




<1. 민족말살정책>


일본은 1920년대 민주주의 운동이 일어나긴 했으나 여전히 전쟁을 통해 얻는 이익이 많았기 때문에 여전히 군국주의를 지향하고 있었습니다. 더불어 일본내에서도 정치인들보다 군인들의 권력이 득세를하여 일본내에서 군대를 막을 힘은 더더욱 없어지게 되었죠.




1) 일본의 경제 대공황 그리고 중일전쟁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급성장한 일본은 1929년 이후로 경제거품이 꺼지면서 경제 대공황에 빠지게 됩니다. 충분한 식민지가 있었던 영국과 프랑스와는 달리 식민지가 많지 않았던 미국과 일본은 굉장한 타격을 입게되죠. 그래서 이들은 식민지 확보를 위해 더욱열을 올리게됩니다.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킵니다. '홍콩편'에서 쑨원이 한족을 대표해 청나라를 몰아냈다고 말씀드린바있죠? 일본은 청나라를 지탱하고 있었던 여진족에게 쑨원이 이끄는 한족으로부터 독립을 시켜주겠다는 약속을하고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후이황제를 복위시켜 자신들에 입맛에 맞게 다스리려한 했는데요. 그때 세워진 국가가 만주국(괴뢰국(꼭두각시정권))입니다. 


<사진1. 진한 빨간색 부분이 만주국 영토>


<사진2. 만주국 국기>


일찍 끝날 것 같던 중일전쟁이 국공합작으로 인해 길어지게되자, 군인들의 옷을 만들기 위해 한반도 북부에 면양사육을 독려하고 남부에는 면화재배를 장려하는 남면북양정책을 수립하게 됩니다. 또한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에 발전소를 건립하고 광업 분야를 성장시켜 군수공장을 대거 설립하게됩니다.


1937년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식민지에 확보에 열을 올린 일본은 지식인들을 통한 자발적 징용, 군자금 모음 독려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노동력과 자분을 차출해갑니다.


<사진3>




2) 민족말살정책 (1941~1945)


일본은 중일전쟁을 위해 광적으로 군수물자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이과정에서 조선총독부는 징병제를 실시하여 조선인들을 군대로 내몰았고, 10대 초반에서 40대에 이르는 여성들을 위안부로 삼게됩니다. 또한 남녀노소 할것없이 군수물자 보금을 위해 군수공장등으로 보내게 됩니다. 이렇게 조선인들은 노예취급을 받기 시작합니다.






또한 일본은 조선이라는 뿌리를 지우기 위해 '창씨개명', '조선어금지' 등 민족말살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그리고 일왕을 숭배하고 자신들과 함께 서양세력에 맞써자는 슬로건을 내세워 일본사상을 심으려고 했습니다.









3) 일본 VS 미국 (태평양전쟁)


무리한 전쟁으로 일본의 전쟁자원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식민지 확보의 경쟁상대인 일본의 세력이 커지자 원유를 중단하게되죠. 그래서 일본은 목재와 석유가 많은 인도차이나반도에 있는 인도네시아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게 되죠. 당시에 인도차이나반도는 영국, 프랑스 식민지였는데 일본은 2차세계대전으로 독일과의 전쟁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정신이 없을거라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인도차이나반도를 들어가기 위해선 중화민국을 지나가야하는데 이 당시 중일전쟁이었으므로 일본은 해양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일본이 가는 길목에 미국식민지인 필리핀이 있었죠. 미국은 당시 필리핀에 군사시설을 주둔히키고 동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하려고 했어요. 일본은 인도차이나반도로 들어가기 위해서 필리핀을 치려고 했는데, 당시 미국은 동아시아에 문제가 생기면 하와이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가 출병한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하와이에 주둔한 미군 기지인 진주만 기지를 습격(1941.12.07)하면서 태평양전쟁의 서막을 알립니다.



하와이를 공격한 후 필리핀까지 점령하여 일본은 계속 승승장구하게 되는데요. 이때 필리핀에서 후퇴한 미군사령관이 훗날 6.25 전쟁에 참전한 맥아더 장군이라고 합니다.


드디어 미국이 자신들의 본 힘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요. 미국은 자국내의 생산시설을 재빠르게 군수산업화시키고 일본과의 전면전을 준비하게됩니다. 그리고는 세계에서 제일 큰 일본의 야마코토 군함을 미드웨이해전에서 침몰시키고 일본으로 진격하게되죠.




4) 미국의 세계2차대전 참전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제2차 세계대전을 방관하던 미국은 일본을 공격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독일,일본,이탈리아'가 동맹을 맺고, '미국,영국,소련,중화민국'이 동맹을 맺게 되면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되죠. 독일은 영국과 미국,러시아 사이에서 이중전선을 펼치게 되었고, 일본은 중화민국과 미국 사이에서 이중전선을 펼치고 있었어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의 암호를 풀어내는 앨런튜링; 인공지능의 기반을 만들게 되는 사건)

독일은 이중전선으로 인해 패망하게 되었고, 일본역시 이중전선으로 고전하던 끝에 미국의 히로시마 원폭으로인해 패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반도에서 물러나게되죠.

<사진4. 연합국의 일본 분단계획>




<2. 독립운동>


1) 상해임시정부 그리고 한인애국단


1931년 김구는 직접적인 항일 투쟁을 추진하기 위해 한인애국단을 조직합니다. 그리고 한인애국단의 첫 거사로서 이봉창에게 일왕을 제거하라는 임무를 주게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일본의 고위간부들과 밀정, 친일파들을 처단할 암살 계획을 세우게 되죠. 






2) 윤봉길


3.1 운동에 자극을 받은 윤봉길은 '식민지 노예교육'을 배격하면서 자퇴를 하게됩니다. 1921년 오치서숙에 들어가 학업을 계속하게 되었는데요. 그곳에서 매헌이라는 아호를 얻게됩니다. 오치서숙에 있던 매곡 선생께서는 동지섣달 차가운 논보라 속에서도 꽃을 피워 향기를 내는 '매화'의 '매'와 조선조 충신 성삼문의 '매죽헌'의 '헌'자를 따서 '매헌'이라는 호를 내려주셨다고 합니다.


당시 누군가가 윤봉길에게와서 묘패의 글을 읽어달라고 했는데, 글을 알려주고나서 묘지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 당황해하는 모습을보고 이런 무지가 나라를 망친다는 생각을하게됩니다. 그리고 애국계몽운동을 시작하게되죠.



1929 오치서숙을 졸업한 윤봉길은 농촌계몽활동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계몽운동에 한계를 느끼고 있던 그는 1930년 '장부출가생불환(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이라는 글을 남기고 집을 떠나 중국으로 건너갑니다. 


1931년 중국 상해에서 채소장사를 하던 그는 김구를 찾아가 그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본격적인 무력투쟁운동을 시작하게됩니다.


1932.04.29 상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리는 상해 전승 기념행사에서 거사를 이행하기로 결정합니다. 폭탄은 도시락 모양과 물통 모양으로 제작되었는데, 그 이유는 당시 상해 전승 기념행사에서 일본측이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도시락을 지참시켰기 때문었어요. 그리고 홍커우 공원에서 그는 물통 폭탄을 단상으로 힘차게 던지고 도시락 폭탄으로 자결하려 했으나 폭탄이 불발되고 윤봉길은 체포됩니다. 그리고 몇일후 사형을 당하게 됩니다.



만주사변으로 충격에 빠진 중화민국 장제스는 윤봉길의 의거 소식을 듣고 중화민국의 100만이 넘는 대군도 못한일을 해냈다며 극찬을 했어요. 그리고 중화민국이 이때부터 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기 시작합니다.



저는 3월말정도에 이곳을 방문했는데요. 그곳에 벚꽃들이 아름답게 피어있었어요. 윤봉길 의사께서도 4월이면 의거당시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이었을텐데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요. 



거사 추정지는 윤봉길 의사를 모셔놓은 '매헌정'이 아니라 홍커우 공원 입구 근처라고 해요!




홍커우공원 안으로 들어가 표지판을 따라가다보면 윤봉길의사 생애사적전시관이 나와요.



홍커우 공원안에서도 따로 윤봉길의사 생애사적 전시관이 마련이 되어있는데요. 이곳은 별도로 아래와 같이 운영한다고 하네요!



제가 방문했을때 마친 어린학생들이 와있었어요. 아이들이 선생님한테 질문도 많이 던지는거 같았어요. 윤봉길 의사가 이 모습을 보고 있다면 얼마나 뿌듯해하실까요? 



아이들이 가는 모습까지 한참을 바라보고 생각에 잠기다가 저도 '매헌정 (윤봉길의사 생애 전시관)' 내부로 들어가기 시작했어요. 제가 그곳에 있었을 때는 아무도 계시지 않았지만 들어가자마자 방문하신분들의 흔적을 볼 수 있었죠.



그곳에서 돌아가실때 묶여있던 형틀을 직접 보게 되었어요. 뭐라고 말을해야할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당시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국제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어요.



나오기전 인사를 드리고 나왔답니다.



'매헌정'을 나오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오는데요.



그곳에 가면 이곳의 보수를 위해서 성금을 하는 곳이 있어서 얼마되지 않은 돈을 내고 왔답니다.



'매헌정' 건물을 배경으로 마지막 사진을 찍었습니다.






3) 중일전쟁 발발 그리고 한국 광복군 창설


중일전쟁 발발로 임시정부는 지속적인 이동을하게 되고 1940년 충칭으로 최종 본거지를 옮기게 됩니다. 이전부터(1936) 장제스의 제안으로 임시정부는 중화민국 전역에 있는 무장세력을 규합하여 광복군 조직을 추친하고 있었습니다. 1939.01.08 창립된 임시정부의 여당 한국독립당 당군을 모태로 하였고 만주 독립군인 지청천과 협력하게됩니다. 그리고 1940.05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이 우선 중국 국민당군의 지휘 하에 둔다는 조건으로 한국 광복군 창설을 승인받고, 충칭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됩니다. (이후 1944.08에 모든 지휘 통수권을 임시정부로 넘겨주게됩니다.)



1942년 김원봉이 한국 광복군에 합류하였고,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일본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게됩니다. 한국 광복군의 일체 비용은 미주, 멕시코, 하외이의 동포들이 부담하였으며 장제스의 부인인 쑹메이링이 이끄는 부녀위로총회에서도 자금을 후원하였어요.


1943년 한국 광복군의 일부 대원이 영국군에 파견되어 인도,버마 전선에서 연합 작전을 전개하였어요. 한편 그해 카이로회담에서 미국,영국,중화민국은 한국독립의 필요성을 인정했지만, 중화민국을 제외한 두 국가는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어요. (미국정부에서는 임시정부를 승인하진 않았지만 미국의회에서는 임시정부를 승인했다고 하네요.)


임시정부는 1944년 소련로부터 승인을 받았고, 1945.04 프랑스로부터 사실상 승인을 받는 단계까지 도달했다고합니다. 이렇게 점차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아가고 있던 와중에 미군과 함께 '독수리 작전'으로 알려진 서울 진공 작전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수복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재빨리 일본이 항복하는 바람에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답니다.



4) 해방이후 임시정부


1945.08.15 꿈에 그리던 광복을 이루었지만 임시정부는 아직도 혼란상태였어요. 당시 공산주의 세력들은 민중의 기초 위에 임시정부를 다시 세우자는 취지에서 임시정부의 총사직을 요구했고, 반대로 임시정부 여당인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임원들이 모두 그대로 귀국해야한다고 주장했어요.


미국입장에서는 임시정부가 반갑지 않은 이유는 여러가지였어요. 첫 번째로는 공산주의 세력이 있다는 점이었고, 두 번째는 중화민국 때문이었어요. 중화민국의 장제스는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독립에 모든 원조를 아끼지 않겠다고 했는데요. 미국은 임시정부가 한반도에 들어와 주요관직에 앉게되면 훗날 한반도의 지위를 중화민국에게 뺏길거라는 판단을 했다고해요.


분란을 원하지 않던 김구는 개인자격으로 한반도에 귀국하게 되었고, 미군도 김구 일행을 보호했어요. 김구를 신뢰했던 탓인지 김구의 경호원들도 무기를 소지하도록 허용되었고, 1914.12.01 임시정부 봉영식이 서울에서 열리게 됩니다.








지금까지 일제강점기에 대해서 다루어봤어요. 여행을 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지만 이번 상해 여행을하면서 매번 머리속에 떠올렸던것은 "민족이란 무엇인가, 민족은 왜 꼭 지켜져야만 하는가"라는 질문들이었던거 같아요.


세상은 돈에 의해 움직이는건데 민족을 지킨다고 뭐가 달라지는건지 많이 생각해보다 아래와 같이 생각을 정리하게되었어요.



"돈은 중요하지.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갖기 위해, 좋아하는 이성에게 선물을 하기위해, 생계를 위한 자신의 가족을 위해, 병든 자신의 노부모를 위해 돈은 중요하게 쓰이지. 돈의 뛰어난 범용성은 '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한다'라는 명제의 당위성을 제공해주길 충분하지. 


돈은 중요하지. 110년전 우리가 빠른 산업화를 통해 경제를 발전시키고 그 힘으로 군사력을 증가시켰다면 이렇게 몰락당하지 않았겠지. 


그래... 돈이 최고지...


그런데 유독 상해와서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돈을 위해서 무엇이든 한다. 왜냐하면 돈이 최고기 때문에!'라는 명제에 반증하는 예시들을 많이 보게돼..


당시 대한제국이라고 해봤자 친일파들 위주였으니 나라가 독립운동가들한테 준건 고통뿐이지 않았나? 누가 독립운동한다고 알아주는것도 아니고 오히려 일본은 친일파보다도 독립운동가들을 더 탐했을텐데. 그리고 돈도 많이 주려고 했고 관직까지 보장했을텐데...


그들이 정말 돈을 거부한것일까?


만약 그들이 돈을 받고 나라를 팔았다면 우리는 훗날 일본인으로써 살지만 불리한 상황만되면 천한 조선인이라는 소리를 들었을거고, 천한 조선인이라는 말을 사실이라고 받아들였을테지...


사실 친일파나 독립운동가나 똑같이 돈이 중요했겠지... 아니 오히려 독립운동가들은 누구보다 힘들었으니 돈의 중요성을 더 절실하게 느꼈을거야


그런데 돈이라는건 원래 가치에서 출발한거잖아? 화폐의 역사를 보더라도 돈은 어떤 필요에 의해서 생긴거고 사람들은 저마다 필요 가치가 달라. 친일파에겐 자신들의 평안이 필요했던거고 독립운동가들은 민족의 평안이 필요했던거 뿐이야. 


그래서 친일파들은 자신들에게 배팅을 한거고 독립운동가들은 민족에게 배팅을 한거겠지. 그때까지만해도 친일파들은 자신들의 배팅이 옳았다고 판단했을거야. 그런데 돌아가신 독립운동가들은 알까? 자신들의 배팅이 미래에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켰는지 말이야."





"당신들은 틀리지 않았어. 당신들은 돈으로 가치를 산 것이 아니라 가치를 통해 돈을 얻는거야. 그것도 대한민국이라는 엄청난 재산을...."












(원본영상은 아닌데 재밌어서 가져와봤어요 ㅎㅎㅎㅎㅎ)















[사진 래퍼런스]

사진1,2

https://ko.wikipedia.org/wiki/%EB%A7%8C%EC%A3%BC%EA%B5%AD

사진3

http://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044&num=200019

사진4

https://ko.wikipedia.org/wiki/%EC%A0%9C2%EC%B0%A8_%EC%84%B8%EA%B3%84_%EB%8C%80%EC%A0%84#%EC%B6%94%EC%B6%95%EA%B5%AD%EC%9D%98_%EB%B6%95%EA%B4%B4,_%EC%97%B0%ED%95%A9%EA%B5%AD%EC%9D%98_%EC%8A%B9%EB%A6%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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