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시간여행자에요!


이번글을 마지막으로 대만여행의 대장정은 마무리하려고 해요~ 그래서인지 조금은 릴렉스한 주제를 다루어보려고해요!


혹시 첨밀밀ost '월량대표아적심'에 대해서 알고계신가요? 모르시는 분들도 아래 노래를 들으시면 "아! 이노래~"라는 반응이실거에요 ㅎㅎ (10초뒤에 노래가 나올거에요~)



갑자기 대만여행에서 뜬금없이 홍콩영화인 첨밀밀을 소개하냐구요? 지금부터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보도록 할게요~!

사실 이 노래의 원곡자(진분란)는 따로 있었지만 추후에 등려군이 이 노래를 리메이크하게 합니다. 등려군은 타이완 바이중이라는 곳에서 태어난 대만출신 가수라고해요. 본래 부친은 국민혁명군이었는데 국공내전 이후 타이완으로 이주했다고 합니다.

1979년 위조 여권 사용 이후 중국어권에서 활동하였는데그녀 자신의 오리지널 노래도 흥행했지만, 리샹란이라는 가수의 노래들을 리메이크해서 더 큰 인기를 불러일으켰어요. 그런데 리샹란이라는 인물은 주로 일본인으로 태어나 만주국에서 활동했고 2차대전 종전 후 일본 귀국 활동 등을 한 이유가 문제가 되어 등려군 노래를 금지하게 됩니다.


또한 등려군은 중국의 민주화운동에도 참여했는데요. 천안문 사건 반대집회 등 중국 민주화운동에도 참여하여 '언제 그대 다시 오나(何日君再)'와 같은 항일 노래도 불렀다고 합니다.


등려군이 한국에 알려진 계기는 첨밀밀(1996)이라는 영화의 ost '월량대표아적심'때문입니다. 그런데,  '월량대표아적심'이 금지곡이었단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등소평이 등려군의 민주화운동에 화가나서인지 '월량대표아적심' 이 음악을 퇴폐적이다라고 해서 금지를 시켰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당시 첨밀밀 ost의 복제 테잎이 2억개가 넘었는데공안들이 음악이 너무좋아 자신들이 압수하고 자신들이 들었다고 해요그래서 낮에는 등소평이 밤에는 덩리쥔이 중국을 지배한다는 소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가사를 해석한걸 보면 너무 멜로디랑 잘 어울려요. 어디가 퇴폐적이라고 한건지;;;;;


월량대표아적심 (月亮代表我的心; 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 표현하네) - 첨밀밀 OST 등려군 (鄧麗君)


(가사)

問我愛有多深,我愛有幾分。

당신은 나에게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물었습니다.

我的情也,我的愛也, 月亮代表我的心。

나의 마음도 진짜입니다. 나의 사랑도 진짜입니다. 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합니다.

問我愛有多深,我愛有幾分。

당신이 나에게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얼마나 사랑하는지 물었습니다.

我的情不移,我的愛不變,月亮代表我的心。

나의 마음은 떠나지 않습니다. 나의 사랑은 떠나지 않습니다. 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합니다.

輕輕的一個吻,已經打動我的心。

부드러운 입맞춤으로 이미 내 마음은 열렸습니다.

深深的一段情,叫我思念到如今。

깊고 깊은 마음에, 날 지금까지 그리워하게 만들었습니다.

問我愛有多深,我愛有幾分。

당신은 나에게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물었습니다.

去想一想,去看一看,月亮代表我的心。

저 달빛을 보며 한 번 생각해보세요. 달이 내 마음을 보여줍니다.

輕輕的一個吻,已經打動我的心。

부드러운 입맞춤으로 이미 내 마음은 열렸습니다.

深深的一段情,叫我思念到如今。

깊고 깊은 마음에, 날 지금까지 그리워하게 만들었습니다.

問我愛有多深,我愛有幾分。

당신은 나에게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물었습니다.

去想一想,去看一看,月亮代表我的心。

저 달빛을 보며 한 번 생각해보세요. 달이 내 마음을 보여줍니다.

去想一想,去看一看,月亮代表我的心。

저 달빛을 보며 한 번 생각해보세요. 달이 내 마음을 보여줍니다.




[가사]

https://ko.wikipedia.org/wiki/%EC%9B%94%EB%9F%89%EB%8C%80%ED%91%9C%EC%95%84%EC%A0%81%EC%8B%AC






대만의 마지막날은 tea한잔에 이 노래를 들으면서 편하게 마무리했던것 같아요 ㅎㅎ 



대만여행은 맛있는 음식도 많고 자연경관도 이뻐서 좋았지만 정말 이곳저곳에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담긴 장소를 방문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ㅎㅎㅎ


이렇게 과거와 마주하고 그 당시로 빠져보니 정말 많은 질문과 답변을 얻을 수 있었던 여행이었어요~ 


다음번에 대만을 가게되면 이번에 가지못했던 단수이와 가오슝을 꼭 가봐야겠어요!!! ㅎㅎ


지금까지 대만편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시간여행자에요!


이전글에서 대만이 일본의 식민지하에 있었으면서 일본을 긍정적으로 생각을 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하려고 합니다~



이전에 대만의 역사에 대해서 다시 리마인드 해볼께요~


원주민들이 서식 ->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침략으로 못살게 굼 -> 명나라의 침략으로 못살게 굼 -> 청나라의 침략으로 못살게 굼 


ㅎㅎ


매우 간단히 요약했죠? 

사실 대만이라는 곳은 본래 원주민들의 나라에요. 그런데 여기저기서 침략해오고 자신들의 문화도 무시하고점령하니 기분이 좋진 않았겠죠??


그런데 1895 청일전쟁 이후 일본에게 패한 대만이 시모노세키 조약에 의해 대만을 할양받게 됩니다.


대만도 1895년 타이완 민주국 수립 선포, 1915년 티파니 사건과 같은 역사적 사건을 통해 항일운동을 벌이곤 했습니다. 


조선도 처음에는 강압적으로 무단통치를 하다가 문화통치와 같은 유화정책을 펼쳤죠? 대만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되는데요. 1922년 일본은 대만에 일본과 같은 법제도를 적용하면서 동화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대만사람들은 지난 스페인, 네덜란드, 명나라, 청나라에게 받은 핍박에 비해 자신들에게 잘해주는 일본이 밉진 않았던거 같아요~ 아래 영상을 보면 좀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으실 거에요!!







이번 대만 여행에서 방문했던 스펀폭포에 있는 철도와 진과스에 있는 일본식 가옥들을 보면서 일본의 흔적들을 많이 살펴볼 수 있었어요.










또 재미난 사실은 대만의 유명한 망고빙수도 일본 식민지 시절의 흔적이라고 하더라구요.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로 열대과일과 설탕을 대량으로 들어왔는데 이때부터 일본에서는 열대과일을 첨가한 '가키고오리'라는 빙수가 대중적인 간식으로 자리잡았다고해요~





그리고 아래사진은 지우펀이라는 곳인데, 일본의 애니메이션 '센과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배경이 됐던 장소에요. (사람이 너무 많아서 큰일날뻔 했어요 ㅜㅜㅜㅜ) 지우펀에 대한 여러 설명들이 있는데 이러한 설명들은 유튜브를 참고하시는게 더 좋을 듯 해요! (여긴 역사관점에서 주로 다루는 블로그라 ㅜㅜ)





당시 일본은 한국과 대만을 다른 태도로 식민지배를 했어요 (물론 대만도 무단통치-문화통치-민족말살정책 과정을 거쳤지만요). 


"그 이유는 경제적인 관점에서 일본과 조선은 대치관계에 있었고, 대만은 일본과 대체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조선에 대해서는 좀 더 강경한 정책을 대만에 대해서는 좀 더 유한 정책을 펼쳤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일본이 조선에 자립할 만한 산업으로 홍삼, 금광 정도가 있었는데 원하는 만큼 수익을 기대하긴 힘들었는데, 그나마 수익을 기대할 만한 사업이 초기에는 쌀농사, 중후기에는 중공업등이 있었다고 해요. 이것은 일본 산업과 경쟁관계에 놓인 산업이었죠


하지만, 대만의 경우는 막대한 설탕, 아편 그리고 각종 상품성 작물 등의 재배가 주요 산업이었는데 이것들은 일본 본토와 경쟁 관계게 놓여있지 않고 대체관계에 놓여있었다고해요. 덕분에 대만에 있는 대만 (일본) 총독부는 10년만에 자립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합니다 (인구수도 대만이 더 적어 일본 입장에서는 먹여살릴 부담도 적었다고 해요).


추가적으로 일제강점기 시대의 한국과 대만이 갖고 있던 일본에 대한 인식을 잘보여주는 재미있는 사례가 있는데 그것이 한국의 최고의 대학 서울대학교, 대만의 최고의 대학 국립타이완대학이에요. 일본은 제국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그것이 제국대학령이었어요. 일본에 7개 대학 (7개의 대학을칠제대라고 한다. 일본의 아이비리그) ‘도쿄제국대학(1886; 현 도쿄대학)’, ‘교토제국대학(1897; 현 교토대학)’, ‘도호쿠제국대학(1907; 현 도호쿠대학)’, ‘규슈제국대학(1911; 현 규슈대학)’, ‘훗카이도제국대학(1918; 현 훗카이도대학)’, ‘오사카제국대학(1931; 현 오사카대학)’, ‘나고야제국대학(1939; 현 나고야대학)’와 식민지 2곳에 각각 하나의 대학을 설립했는데, 그 중 하나가 경성제국대학 (1924), 다이호쿠제국대학 (1928) 이다. 이 두 대학은 오늘날 서울대학교와 국립타이완대학이라고 불리고 있는데, 서울대학은 경성제국대학을 자신들의 전신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데 반해 국립타이완대학은 다이호쿠제국대학을 자신들의 전신으로 인정하고 있는 차이를 보인다고 합니다."  --> https://namu.wiki/w/%EB%8C%80%EB%A7%8C-%EC%9D%BC%EB%B3%B8%20%EA%B4%80%EA%B3%84    



이번여행을 하면서는 '왜 우리는 아직도 그 시절의 잔재에 대해 저항을 하고있고, 대만은 아직도 일본을 그리워하는지'에 대한 생각에 잠겼던것 같아요.


이러한 태도들이 오늘날 한국과 대만의 경제격차를 불러일으킨거라고 연결짓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계속 여러 생각을하게 만들더라구요. 민족성을 지키려는 의지에서 차이가 있었던건지, 아니면 단지 우연이었던건지..


당시에 여행을 마치고 숙소에 들어와 이런 질문들을 하고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을때 우연히 암살 영상을 보게됐는데, 그냥 그때 생각나서 링크 걸어놨어요ㅎㅎ 







  이상 글을 마무리 할께요~~ ㅎㅎ



 저 앞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계속 걸어가겠죠? 








안녕하세요~ 시간여행자에요!


오늘은 과거 대만사람들이 반한감정을 가진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보도록 할께요! 이번장에는 대한민국과 대만의 관계를 시기별로 나누어 설명하려고 해요~



1) 초기

본래 중국과 북한이 공산주의 연합이었고, 한국과 대만이 민주주의 연합이어서 전우애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대만을 자유중국 (중화민국) 이라고 불렀고, 중국을 중공(중화인민공화국)이라고 불렀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중국이라고 하면 중화민국즉 대만을 일걷는 말이었다고 하네요


단교 직전인 1990년 기준으로, 서울에는 미국, 소련, 프랑스, 서독, 영국, 일본, 이탈리아 등 이른바 세계 열강의 대사급 외교관이 상주하여, 중화민국 외교관이 대사 자격으로, 강대국 대사들과 대등하게 접촉하는 유일한 공간이 대한민국 이었기 때문에 한국과 대만의 관계는 상당히 끈끈했다고 하네요.


 

2) 대만 UN 탈퇴


1945년부터 한때 대만은 UN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 중 하나였지만, 1971 10 25일 중화인민공화국이 UN에 공식 가입하게 되면서 UN 총회의 투표 결과에 따라 결국에는 중화인민공화국에게 상임이사국 자리를 내줘야 했고 UN에서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탈퇴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UN 총회에는 중화민국 축출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상임이사국 지위 획득을 지지하는 알바니아의 결의안과 그것을 반대하는 미국의 안이 동시 상정되었는데, 서방 국가들(캐나다, 프랑스, 이탈리아 등)도 다수가 알바니아의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져 미국에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때는 아직 중국의 저력이 핵무기 정도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어느 정도 예견되기도 한 결과인것이, 프랑스는 이미 1960년대에 중국과 수교했다. 당시 미국은 중국을 대표하는 권리는 포기하되 대만(Taiwan) 지역의 주권국가로서의 회원국 지위는 유지하는대만 공화국? 타협안을 제시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나라들이 반대하고 중화민국도 거부하여 무산되었고, 표결 직후 UN 총회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합법적 권리 회복을 골자로 하는 '2758호 결의'가 찬성 76, 반대 35, 기권 17로 통과되고, 그 직전에 중화민국이 스스로 UN 탈퇴 선언을 함으로서 UN 상임이사국 지위는 물론 회원국 지위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 서방국가들 또는 UN 가입국들이 중국의 영향력 (중국에 자신들의 기업들을 투자 유치 등) 을 우선으로 하여 대만을 버린 것이라 할 수 있는데요. 사실, UN에서는 중공의 UN 가입을 반대하다가 중소결렬 (공산주의의 해석차이 + 한국전쟁에 소련이 중국을 제대로 돕지 않음 (소련은 남한 침략에 회의적이었음)) 이후에 미국을 위시한 서방국가들이 소련 견제를 위해서 중국과 손 잡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리면서 정책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국제 정세의 변화는 대만을 중국의 정통 정부로 인정하고 국교를 맺어온 한국에게도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특히 한국전쟁의 일방 당사자 가운데 하나였던 중국이 UN에 가입하고, 그것도 상임이사국이 됨으로서 한국전쟁 휴전 협정이 무효화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한국 사회에 밀어닥치기도 했다. 그걸 빌미로 유신헌법이 만들어져 제4공화국이 출범하기도 했습니다.

 


3) 한중 수교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은 이토록 친밀했지만 1971, 중화민국이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와 전 중국의 대표자격을 빼앗기며 UN에서 추방당할 때(대만 축출)는 도움을 주지 못했는데요. 그 이유는 당시 한국은 공산권의 반대로 참관국이었을 뿐, 가맹국이 아니라 반대표를 던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1988년에 출범한 노태우 정부가 공산권과 외교 관계 개선에 적극 나서면서 한국-중국 및 한국-대만 관계에 변화의 기류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소위 북방정책으로 표현되는 이러한 외교 노선에 따라 한국은 헝가리,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동구권 국가들과 수교한 데 이어 1990 10월에는 공산주의의 종주국 소련과 수교함으로써 북방정책의 정점을 찍게 되는데요특히 중국은 한국과 수교할 경우 이에 반발한 북한이 친소로 기울어질 것을 염려하여 한중 수교에 미온적이었는데, 1991 8월 쿠데타 이후 소련이 급속히 와해되면서 상황이 급변하게 됐다고합니다


한국은 노태우 정부의 사실상 임기 마지막 해인 1992년 안에 중국과 수교함으로써 북방정책의 대미를 장식하고 싶어했고, 중국 역시 한국과 수교함으로써 대만을 아시아에서 완전히 고립시키게 되었습니다. 물론 한중 수교가 가시화되면 북한과 대만이 견제에 나설 게 불 보듯 뻔한지라 한중 외교 당국자들은 북한과 대만을 설득하여 양해를 구하는 절차를 생략하고 비공개로 직접 수교 교섭을 벌여야 했습니다.

 


4) 단교

1992년에 대한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 교섭을 할 때 중국 측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중국원칙을 들이대며 대만과의 단교를 조건으로 내걸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중국의 외교에서 최우선 원칙으로 대한민국에만 요구한 것은 아니였으며, 당장 미국도 1979년 중국과 수교하면서 중화민국(대만)과는 단교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은 당시 중화민국에 있어 최후의 대국이었는데요. 중화민국 외교관이 외교부장(외무부 장관)으로 가는 엘리트 코스의 마지막 관문이 바로 주한대사였다고도 합니다


그렇지만 한중수교는 한국의 입장에서는 북한에 대해, 중국의 입장에서는 대만에 대해 외교적 판정승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양국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는 부분도 있었기에 언젠가는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한국과 대만의 관계가 틀어진 것은 단교가 되고 나서부터이다. 마침내 중국과의 수교가 정식으로 맺어지기 일주일 전인 1992 8 15. 결국 한국 외무부는 중화민국 대사를 소환해 비공식적으로 중국과의 수교, 중화민국과의 단교 계획을 밝힙니다. 한편 첸푸 외교부장은 주한 대사관으로부터 한중수교 합의를 통보받은 후 8 19일 입법원 대표들을 외교부로 불러 한국이 중국과 수교하고 대만과 단교한다는 사실을 통지하고 이에 동요하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하지만 입법원 의원들은 외교부장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이를 즉각 언론에 누설하였고, 대만 내 여론은 격분했다. 한국 정부는 대만 소식통을 통해 한중수교 뉴스가 전해지자 처음에는 즉각 부인했다가 결국 하룻만에 이를 번복하여 한중수교 사실을 시인했는데, 이 때 대만에 유학중이던 한국외대 중국어과 학생이 대만인들에게 폭행을 당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8 21일 공식적으로 중화민국에게 단교 문서를 전달하려고 했는데, 중화민국측에서 선수를 쳐 대한민국과의 단교를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중국과 수교를 맺은 24, 중화민국 대사관에 72시간 내에 국기와 현판을 내리고 철수해줄 것을 요구했고, 이후 중화민국 대사관은 6시간 만에 국기 하강식을 갖고 한국을 떠났습니다. 실제로 당시 중화민국 국적의 화교들이 눈물로 진 대사를 배웅했으며, 일부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거리에 나가 한국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고 합니다.


 

5) 중국

중화인민공화국을 국가승인하지 않았던 한국이 1988년 한국이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호칭을 중공에서 중국으로 변경했을 때, 중화민국 측은 항의했습니다. 중화민국이 중국 대륙의 정통 국가라는 원칙을 훼손하기 때문입니다. 여러 번 강조되지만, 여타 소국들과 달리 한국은 차례 차례 단절되어 가는 중화민국 외교에서 최후의 대국이었기에 그러한 조치가 중화민국 입장에서는 중대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는데요. 아래와 같은 연설은 당시의 대만의 입장을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한·중 외교관계 수립으로 대만은 이번에 세 번째 타격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는 1971년 유엔에서 쫓겨난 것이고, 두 번째가 미중 수교, 세 번째가 한중 수교라는 것입니다. - 첸지천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장의 국제정세 문제에 관한 연설(’92. 09. 05.)

 



6) 그외의 반한감정 요소들

다음장에서 일본과 대만과의 관계를 설명할텐데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대만은 일본에게 굉장히 긍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부분이 반한감정을 부추기는 또하나의 요소라고도 하는데 더욱 중요한 요소는 대한민국의 성장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사실 대만은 우리나라보다 경제적으로 굉장히 앞선 나라였는데요 (한국전쟁이후에는 모든 나라가 대한민국보다 잘 사는 나라였죠;;). 대한민국이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하자 상대적으로 대만이 뒤쳐지는 모습에 반한감정이 생겼났다고해요. 물론 대만과의 수교를 단절한 것이 큰 요소였겠지만, 앞서 언급했던 여러요소들이 결합하여 반한감정을 부추기는 역할을 했다고해요




7) 현재

하지만 요즘 세대들은 반한감정이 있었나 할정도로 대만과 한국의 관계는 우호적으로 변했습니다. 특히 요즘에는 Kpop의 영향으로 요즘 세대들은 서로에 대한 호감도가 점차 올라가는 중이라고해요~  2018년에는 더욱더 교류를 활발하게 하기위해서 한국인들은 입국시 혜택을 주는제도도 생겼다고하는데요. 여행했을 당시에도 반한감정같은게 뭔가할 정도로 사람들이 친절했고 아무튼 너무 좋았습니다~


외국공항에서 한글이 적혀진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요????????? ㅎㅎㅎㅎ


 


https://namu.wiki/w/%ED%95%9C%EA%B5%AD-%EB%8C%80%EB%A7%8C%20%EA%B4%80%EA%B3%84

https://namu.wiki/w/%EB%8C%80%EB%A7%8C/%EC%99%B8%EA%B5%90

https://namu.wiki/w/%EC%A4%91%EC%86%8C%EA%B2%B0%EB%A0%AC

 

 


안녕하세요~ 시간여행자에요!


이번시간에는 대만의 초대 총통인 장제스라는 인물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해요!


지난시간에 본성인, 외성인 등을 설명하면서 청나라가 대만이라는 섬을 실효지배했다고 배웠어요. 이번장에서는 대만의 초대 총통인 장제스라는 인물이 어떻게 등장했는지 알아보려고해요.


사실 청나라가 멸망하고 오늘날의 중국으로 넘어가기까지 굉장히 많은 사건이 있었는데요, 그 과정은 홍콩편 '쑨원은 누구인가?'에서 언급하려고합니다. 그러니 여기에서는 시간적 흐름만 설명만 하도록 할께요!


'1894 청일전쟁' -> 청나라 패 -> 청나라 학생 중 하나인 쑨원이 국가의 무능함에 분개 -> 황제가 아닌 백성을 위한 나라를 만들고자 함 -> 삼민주의(민족, 민권, 민생)를 앞세워 혁명을 일으킴 ->  1912년 신해혁명을 통해 청나라 몰락시키고 '중화민국(대만)'을 수립 -> 국민당 창당 -> 쑨원은 소련의 도움을 받은 공산당 세력 (모택동)을 포섭 -> 1925년 쑨원 사망 -> 장제스가 국민당 대표가 됨'


장제스에 대한 좋은 영상이 있어서 유튜브링크를 걸어 놓을께요. 한 번 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아요!



당시 청나라가 몰락하고 쑨원이 곧바로 모든 청나라의 영토를 지배한 것은 아니었어요. 군벌세력들이라고 해서 여러 세력들이 존재했는데 장제스는 모택동과 함께 1차 국공합작을 통해 이러한 세력들을 진압해 나갔어요.


하지만 진압하는 과정에서 모택동의 공산당원들이 희생을 당하자 더이상 합작을 진행하지 않았는데요. 장제스는 민주주의 이념에 반하는 공산당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1927.4.12 상하이에서 공산당을 진압하기 시작했어요. 이것이 바로 국공내전이에요. 


하지만 일본의 제국주의가 거세지기 시작하면서 다시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지기 시작해요. 1943년 미국(루즈벨트), 영국(처칠), 중화민국(장제스)은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 모여 5일간 회담을 갖게 되는데요. 여기서 한반도의 독립이 비공식적으로 논의 되었다고 해요. 비공식회담이라 공식적인 문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장제스는 한반도의 독립을 주장했다고 해요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지만요). 아무튼 장제스가 윤봉길 의사에게 감동받아 상해임시정부를 도와주었던 점도 있었고 대한민국에게는 많은 도움을 주려했던것 같아요. 이와 관련한 자세한 부분은 상해 여행에서 다룰께요~


1945년 미국의 히로시마 원폭으로 일제가 항복하자 1946~1949년 제2차 국공내전이 발생하게되요. 처음에는 장제스의 중화민국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지만 점점 모택동의 중국 공산당에게 밀려나게 되고 지금의 대만섬으로 피신했다고 해요.


장제스가 일본에게 대항할 때, 당시 자신들의 역사가 담긴 신석기 때부터 청나라까지의 문화재들을 지키기 위해 가장 귀중한 69만 여점을 선별해 각종 지역에 숨겨두었는데,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에게 밀리면서 대만으로 이주할때 모든 문화재들과 군인 200만을 데리고 갔다고 해요


이때 옮겨진 문화재들이 현재 타이페이 부근의 고궁박물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박물관은 동양의 역사와 문화재를 대표한다는 측면에서 세계 4대 박물관 중 하나로 뽑히고 있는데, 사실 신석기때부터 청나라때까지 가장 유명한 문화재를 보려면 현재 북경이 아닌 대만의 타이페이로 가야한 다고 합니다!


중화민국은 섬으로 피신하고 중국공산당이 모든 영토를 지배하게 되자, 결국 중국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오늘날 중국)으로 바뀌게 되고, 1970년대 UN에서도 중화인민공화국의 압력에 밀려나게되요. 상임이사국 자격을 박탈당하죠. 그 이후로는 여러나라들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압력에 못이겨 단교를 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요. 결국 1992년 대한민국과도 단교를 하게됩니다.



이번장에서는 장제스에 대해서 알아봤는데요. 그 과정에서 언급된 "고궁박물관"과 장제스를 기념하는 "중정기념관"을 방문했기에 관련 후기를 쓰려고해요~



<1.고궁박물관>


아래가 고궁박물관이에요. 박물관안에는 굉장히 많은 유물이 있는데, 실제로는 모든 문화재를 전시를 하지 않는다고 해요 (워낙 수가 많으니까요;;ㅎㅎ). 고궁박물관 뒤에 있는 3000M 넘는 고봉 200개에 보물을 숨겨놓고 3개월마다 교체하는데, 모든 유물을 다 보려면 30년이 걸린다고 하고, 주요 전시물들을 제외한 것들은 3~6개월 마다 교체한다고 해요!





사진촬영이 허용된 문화재중에 대표적인 '취옥백채'만 사진으로 남겼었어요. 취옥백체의 정보는 아래와 같아요.

사용용도: 청나라 11대 광서제의 왕비인 서비의 혼수품

줄기의 하얀색 부분: 순결을 의미

초록 잎: 미와 젊음을 의미

한쌍의 메뚜기: 다산의 의미



공식적으로 확인 된 바 없으나 중국이 대만의 UN 가입 조건으로 비밀리에 제안한 것이 바로 취옥백채를 들려주는 것이었다고 해요. "만약" 사실이라면 이 제안을 대만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였으니 이 옥배추가 지닌 무한한 예술적 가치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외 여러 문화재들을 감상할 수 있어요. 그리고 정말 오래된 문화재이지만 정말 독특하고 세련된것들이 많았어요. 오늘날에는 모든 것을 기계로 만들지만 저 당시에는 저런것들을 모두 손으로 많들었던것을 생각해보면 과거의 사람들이 현대인보다 손재주는 훨씬 뛰어났을것 같다는 생각을했어요.



<2.중정기념관>


1975년 장제스 사망을 기리기 위해 중화민국 행정원이 기념당의 건설을 결정하였고해요. 




본당 건물의 높이가 70m. 본관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모두 89개인데, 이는 장제스가 사망한 나이 89세를 의미한다고 해요. 제가 방문했을 때는 보수공사중이었어요. 



해당 부지는 본래 육군본부 및 헌병사령부로 쓰였던 곳이고, 미국의 링컨 기념관을 본따 만들어졌다고해요




중정기념당의 경비병들은 모두 현역 군 의장대로 구성되는데, 10~17시 사이에 매시 정각마다 교대를 한다고해요. 건물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이 서북쪽 방향인데 이것이 중국본토 방향이라고해요. (본토의 수복의지를 표현한걸까요?) 당시 방문했을 때 교대식을 영상으로찍었는데 용량크기 때문에 편집을해야할 것 같네요 ㅎㅎ 시간있을 때 금방해서 올릴께요!



중국의 전통적 건축양식의 하나로, 패방(엄밀하게는 패루)이라는 문이 있는데 중국에서는 지금도 사적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나 시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를 조성할 때 패방을 세운다고해요. 


"본래 건립 당시에는 大中至正(대중지정)'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민진당 시대에 이걸 '自由廣場(자유광장)'이라고 바꿔 버렸다. 대중지정(大中至正)'이라는 의미는 치우침 없이 공정하다는 의미로 장개석의 호인 중정과 관련이 있었는데, 마잉주(馬英九) 총통어 전임자인 야당 민진당의 천수이볜 전 총통이 집권한 후, 민진당은 국민당의 흔적 지우기 일환으로 대중지정이란 글자를 지우고 자유광장으로 바꾸었습니다. 중정기념당의 이름도 대만민주기념관으로 바뀌었다가, 후에 다시 중정기념당으로 환원되는 일도 있었죠." 인용사이트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ek0705&logNo=221672269799&categoryNo=7&parentCategoryNo=0


그런데 문구를 바꾸는것만으로도 엄청난 세금이 투입된다고해요. 그래서 더이상 문구를 바꾸지 않고 그냥 두었다고합니다.



현재 대만에는 국민당과 민진당이 주요 정당인데, 아이러니하게 국민당은 중국과 우호적일 것을 주장하고 있고, 민진당은 대만의 강력한 독립을 주장하고 있어요. 차이잉원 현 총통은 이러한 기념당이 권위주의 숭배라며 기념품 판매를 금지시키고, 매년 2.28일 폐관을 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대만 국민은 대만의 독립을 강력하게 지지하지만, 랜드마크가 되어버린 중정기념관을 비판하는 민진당에 대한 입장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이 지배적이라고 해요. 






중국분들이 이 글을 보면 싫어하실 수 있겠지만, 대한민국 사람입장에서는 임시정부를 도와주었던 장제스가 무력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공산당을 흡수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해요. 장제스가 쑨원만큼 했다면, 장제스가 오늘날 중국을 통일했다면, 오늘날 중국이 민주주의 국가였다면 우리나라가 분단되는 일이 있었을까요?


여행내내 대만이라는 곳을 둘러보면서 이러한 생각들이 항상 맴돌았네요! 





안녕하세요~ 시간 여행자입니다!


현재 대만 인구는 85% 이상의 본성인과 14%의 외성인 나머지 1% 이하의 내성인으로 구성되어있다고 합니다. 내성인은 뜻 그대로 '안 내'자를 사용하여 타이완 땅의 본래 주인인 원주민들을 뜻한다고 합니다. 


외성인은 '바깥 외'자를 사용하여 1950년 이후 중국 본토에서 타이완으로 이주한 사람들을 지칭한다고 합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10장'에서 말씀드릴께요!) 



그렇다면 본성인은 누구일까요? '근본 본'이라는 한자를 쓸 정도면 타이완의 뿌리라고 생각한다는 건데, 오늘날 대만은 어느 민족을 자신들의 뿌리라고 생각하고 있는걸까요? 본성인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네덜란드가 타이완을 지배하고 있던 17세기 중반으로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1626년 네덜란드가 타이완을 완전히 점령했던 시기에 한족이 건국했던 명나라(1368~1644)는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반대로, 여진족이 건국한 청나라(여진족→후금→청나라; 1644~1924)는 점점 세를 넓혀가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명나라의 군인 겸 정치가인 정성공이 남쪽으로 후퇴를 하다 결국 1661년에 타이완으로 모든 군대를 끌고 후퇴하게 됩니다. 막대한 군사력으로 타이완에 있던 네덜란드를 몰아내고 정성공은 '정씨왕국'을 세우게 되는데, 이도 오래가지 않아 1683년 청나라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네덜란드와 정씨왕조가 타이완을 지배하고 있을 당시 다두왕국이라는 원주민 부족연합이 있었는데, 이 부족도 청나라에 의해 멸망했다고 합니다. 


이로써 청나라는 타이완을 자신들의 영토로 두게 되었습니다 (푸젠성 관할로 두게 되었죠!)


   


<그림 출저: https://ko.wikipedia.org/wiki/%ED%91%B8%EC%A0%A0%EC%84%B1>



명나라가 멸망했지만 여전히 청나라 남쪽 지방에는 한족출신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청나라에 불만을 갖고 있던 한족 출신들이 푸젠성과 광둥성에서 타이완 남쪽인  타이난으로 대거 이주를 하게 됩니다 (본래 타이완을 지배하고 있던 네덜란드가 타이난을 거점으로 삼고 있었던 타이난이 타이완의 중심지었다고 합니다. 정씨왕조가 오래 되지 않았기 때문에 중심지를 타이페이로 옮기거나 한 일은 없었던 것 같아요!)



어쩌면 타이완은 청나라의 지배를 받았지만 청나라(여진족)를 싫어하는 명나라(한족)를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시간이네요!



이번에도 여행후기는 따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만 주민들 대부분이 본성인들이니까요!






[Reference]



하멜에 대한 이야기는 박연이라는 인물과 함께 추후 업데이트 하도록 하겠습니다!

[Reference]

https://www.youtube.com/watch?v=BoI5uMw2fEU

https://www.youtube.com/watch?v=nA13vgqBMpE

안녕하세요~


이번 chapter를 설명하기 전에 이전 chapter에 대해서 간략히 요약하고자 합니다. 


중세교회의 몰락에 따른 르네상스 운동과 오스만 제국의 번성으로 인하여 유럽국가들은 대항해시대를 열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포루투갈은 타이완이라는 섬을 발견하게 되고 '포르모사(아름다운 섬)!'라고 명명했습니다. 포루투갈은 타이완을 점령하는 대신 원주민들과 무역을 하는 정도로 만족했습니다.



17세기 중반에 들면서 네덜란드와 스페인은 제국주의 국가 중에서도 선봉장 역할을 하게 됩니다. 1624년 네덜란드가 펑후제도와 타이난에 당도하게 됩니다. 




<그림출저:  http://m.blog.daum.net/byhkmgkht/4635?tp_nil_a=2>



포루투갈과 달리 이들은 열대지역에서 재배가 되는 사탕수수를 발견하자 해당 지역을 지배하게 됩니다 (유럽인들이 향신료 만큼 달달한 맛을 내는 사탕수수(설탕)에도 큰 관심이 있었다는 것은 아프리카를 식민지 지배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겠죠! 열대지역이다 보니 다른 열대과일도 유명해서 여행하시다보면 망고를 먹을 기회도 자주 접하실 거에요!). 



당시 명나라는 펑후제도는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했지만, 타이완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펑후제도에서 물러나는 대신 타이난 지역에 상업단지를 세우는 것에 합의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펑후제도도 별 생각 없었는데, 다른 사람이 자신 영토의 가까운 곳에 진을 치고 있으니 이를 경계하고자 펑후제도를 포기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때 타이난 지역에 요새를 하나 세우게 되는데 그것이 '질란디아 요새'입니다. 




<질란디아 성 출저: https://ko.wikipedia.org/wiki/%EC%A7%88%EB%9E%80%EB%94%94%EC%95%84_%EC%9A%94%EC%83%88_(%ED%83%80%EC%9D%B4%EC%99%84>



네덜란드에 이어 곧바로 스페인도 타이페이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1626년). 스페인은 타이완 북부의 지룽, 서랴오섬에 산살바도르라는 성을 세우게 되고, 오늘날의 단수이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단수이에서 세운 성이 산토도밍고 라는 섬입니다. 


 



    

<단수이 출저: Google Map>


 

<홍마홍청 출저: http://www.tshs.ntpc.gov.tw/tshs_kr/xmdoc/cont?xsmsid=0I149562300364621346>





산토도밍고는 오늘날 홍마홍청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스페인과 네덜란드가 서로 패권의 선두에 서기 위해 지속적으로 다투곤 했는데 타이완에서도 이러한 다툼이 이어졌습니다. 결과적으로, 네덜란드가 스페인을 이기고 타이완 북쪽까지 점령하게 됩니다. 이때, 단수이 주민들이 네덜란드 사람들을 보고 홍마호(붉은 머리카락)라고 부르면서 산토도밍고 성을 홍마홍청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1867년 부터는 영국과 미국 영사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하네요).  



이로써 네덜란드가 타이완을 점령하면서 극동아시아로 진출하게 될 교두보를 마련하게 됩니다. (하지만 모든 지역을 점령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100% 타이완을 지배했다고 볼 수 없을것 같네요! 자세한 이야기는 5장에서 설명하겠습니다!)


이 후, 유럽인으로써 최초로 조선이라는 나라를 묘사하는 인물을 만날 수 있게 되는데, 그 외국인이 하멜(네덜란드)입니다. 1653년 대만에서 일본으로 가는 중에 표류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멜은 그 표류했던 그 당시에 대한 기록을 적게되는데,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하멜 표류기'입니다. 하멜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더 자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 




계속 즐거운 과거 여행 하세요!!








[여행 후기]


제가 이번 대만 여행에서는 타이난과 단수이를 가보지 못했습니다 ㅜㅜ

하지만 나중에 타이난과 단수이를 가게 된다면 꼭 질란디아 성과 홍마홍청에 가서 과거 17세기 중반 스페인,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한 번 물어보고 싶네요.



"사탕수수가 그리 좋디?" 






[Reference]

https://namu.wiki/w/%ED%83%80%EC%9D%B4%EC%99%84%20%EC%84%AC/%EC%97%AD%EC%82%AC

https://ko.wikipedia.org/wiki/%EC%A7%88%EB%9E%80%EB%94%94%EC%95%84_%EC%9A%94%EC%83%88_(%ED%83%80%EC%9D%B4%EC%99%84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qwepo123&logNo=221227383578&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kr%2F

https://ko.wikipedia.org/wiki/%ED%9B%99%EB%A7%88%EC%98%A4%EC%B2%AD

http://www.hendrick-hamel.henny-savenije.pe.kr/hollandk15.htm

[역사 part]


안녕하세요! 시간여행자입니다.


이번에는 대만의 과거와 대화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이 번창했던 시기로 가보려고 합니다.


 고대 로마시대부터 유럽인들은 후추와 같은 향신료와 과거 설탕 역할을 했던 사탕수수를 즐겨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향신료는 인도와 동남아시아로 부터 중동(아라비아)를 통해 유럽으로 들어오는 수입되는 유통구조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14세기 부터 본격적으로 오스만 제국이 영토를 넓히게 되자 나중에는 이 향신료들이 오스만 제국을 통하지 않고서는 들어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오스만제국은 향신료에 대한 운송료를 인상하기 시작합니다.








14세기에는 중세교회의 몰락과 함께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의 권위로 인해 억눌렸던 인간으로 부터 파생되는 가치들 (기술, 예술, 등) 이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선박제조기술과 개량된 송나라(중국)의 나침반(by 이탈리아) 을 통해 향해 기술이 급격히 발전하게 됩니다.


15세기 말 (1497) , 이 때문에 향신료 값이 오르게 되자 유럽인들은 인도, 동남아시아와 직접 교역 하고자 대항해 시대를 열기 시작합니다. 


유럽 대륙 제일 서쪽에 위치하고 있어서인지 포루투갈이 대항해의 선봉장 역할을 맡았습니다. 아프리카 연안을 정복해 가면서 80년만에 인도로 갈 수 있는 항로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인도가 아닌 미대륙을 발견한 스페인의 콜럼버스도 비슷한 시기에 대항해를 시작했는데요, 콜럼버스는 서쪽으로 계속 가다보면 인도가 나올 것이라 생각했다고 합니다. )





    





포루투갈은 인도에서 멈추지 않고 동쪽 방향으로 항로를 개척하고 있었습니다. 1590년에 항로를 하던 중 작으만한 섬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포루투갈은 당시 그 섬을 점령하기 보다는 잠시 무역이나 하는 것으로 만족했다고 합니다 (굳이 섬 하나에 국가역량을 쏟아 부을 필요는 없었다고 판단한 듯 합니다. 그 섬을 점령하고 유지하려면 막대한 돈이 들어갈 테니까요!).








당시 포루투갈 선원들은 그 섬을 보고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그 섬을 포루투갈어로 포르모사(llha Formosa; 아름다운 섬)! 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 섬은 열대지역이라 울창한 나무와 섬 모두가 녹색으로 둘러싸여져 있었기 때문에 유럽사람들이 보면 아름답다!고 말할 만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포르모사를 오늘날 우리는 타이완(대만)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그래서 종종 유럽인들은 타이완을 아직도 포르모사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다음장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설명을 드릴텐데, 네덜란드가 타이완의 남쪽을 스페인이 타이페이의 북쪽을 점령하게 되는데 이를 각각 네덜란드령 포르모사, 스페인령 포르모사라고 불렀다고 하네요!




오늘 여행 어떠셨나요?   


사실 타이완에서 과거 포루투갈의 모습을 볼 수 없지만, 타이완 여행을 하시다보면 16세기 말 포루투갈 선원들이 타이완을 보고 느꼈던 감정을 느끼실 수 있을거에요! 어디를 가던 녹색을 볼 수 있고, 어떤 목적지를 가던 녹색으로 뒤덮인 타이완을 보게 된다면 마음속으로 과거의 포루투갈 선원들에게 속삭여주세요!


"Formosa!"



[여행 후기]


이번 장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딱히 포루투갈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없기 때문에, 제가 여행중에 느꼈던 Formosa라고 할 만한 사진 몇 장만 업로드 하겠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청수단애, 스촨폭포, 타이루거 협곡 등에서 Formosa를 느꼈던 것 같아요!)






















그럼 오늘도 즐거운 과거 여행이었길 바랍니다!






[Reference & Image]

https://namu.wiki/w/%EC%98%A4%EC%8A%A4%EB%A7%8C%20%EC%A0%9C%EA%B5%AD#s-4.1.1

2015 KBS 대기획 바다의 제국 4부작 - 욕망의 바다, 바스 코 다가마 1차 항해

https://ko.wikipedia.org/wiki/%EB%B0%94%EC%8A%A4%EC%BF%A0_%EB%8B%A4_%EA%B0%80%EB%A7%88#%EC%A0%9C1%EC%B0%A8_%ED%95%AD%ED%95%B4

https://ko.wikipedia.org/wiki/%EB%B0%94%EC%8A%A4%EC%BF%A0_%EB%8B%A4_%EA%B0%80%EB%A7%88

https://namu.wiki/w/%EB%B0%94%EC%8A%A4%EC%BD%94%20%EB%8B%A4%20%EA%B0%80%EB%A7%88

https://ko.wikipedia.org/wiki/%EA%B3%BC%ED%95%99_%ED%98%81%EB%AA%85

http://leechee.tistory.com/1071

https://en.wikipedia.org/wiki/Portuguese_discoveries

[역사 Part]


 이번장에는 역사 부분에 대해서 설명드릴 것이 크게 없습니다. 하지만, 대만을 이해하는 시작점이 대만의 원주민들이기 때문에 짧게 기술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래 대만의 역사를 간단하게 서술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원주민 -> 스페인, 네덜란드 -> 명나라 -> 청나라 -> 중화민국 ->대만


 본래 현재 대만땅의 주인은 원주민이었습니다. 당시 여러 부족들이 대만을 구성하고 있었고, 지역끼리 자신들만의 연합왕국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부족간의 연합정도일 뿐이지 오늘날의 국가의 모습을 갖추진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국가의 정체성이 없었다는 뜻이 됩니다. 




 다음 장에서 설명하겠지만, 대만이라는 섬에서 하나의 통합된 국가가 생기기 전에 네덜란드, 스페인의 침략을 받게 되었는데 이러한 과정 때문에 대만이 일제강점기 시절에 일본에 대한 감정이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대만에서는 왜 망고빙수가 유명한 것일까?'편에서 설명하겠습니다!). 


 이번 장의 역사 부분은 이정도 까지 입니다. 사실 원주민들이 현재 대만역사의 큰 영향력을 끼친 부분이 없었으므로 내용은 많이 다루진 않았지만, 본래 대만 땅의 주인은 원주민들이었다는 사실만 알아도 대만을 이해하는데, 좋은 스타팅 포인트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다음 편에서 뵐께요! 




[여행 후기 및 정보]


#원주민 #화롄투어 #고궁박물관


 대만여행을 계획하시다 보면 심심치 않게 '화련(롄)투어'를 볼 수 있습니다. 보통 대만 여행을 짧게 3박 4일로 잡으시는 분들은 타이페이 위주로 여행을 가시는 분들이 계실텐데, 자연경관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하루 정도는 화롄투어(보통 '타이루거협곡'-'청수단애')를 이용하시기도 합니다. 


 대만은 1년 중 200일이 비가 온다고 합니다. 제가 이번 화련투어 계획을 세울 때, 비가 오지 않는 날짜로 잡았는데,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화롄투어(or 예스진지 투어)와 같이 실외활동이 많거나 자연경관을 보기위한 투어를 고려하실 때에는 비가 오는지 않오는지 꼭 알아보세요!! 






타이페이 근처 숙소에 있으신 분들은 보통 투어를 신청해 택시나 기차를 이용하게 됩니다. 이동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투어입니다 (제가 갈때는 대략 편도 2시간정도 걸렸고, 그곳에서 또 버스를 타고 이동했기 때문에 실내에 있는 시간이 조금 길다는 점 알아두었으면 합니다!). 


아! 그리고 대만 지하철에는 아래 빨간색 네모박스 부분 처럼 대기선이 있는데, 그 방향으로 대기를 한다고 합니다. 모양은 몇 가지 더 있는데 혹시 지하철을 이용하시게 되면 대만 지하철 에티켓도 알아두시면 좋을 듯 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기차를 타고, 역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대략 40분 후에나 투이루거 협곡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타이루거 협곡에 도착하시면 정말 멋진 전경이 펼쳐집니다. (도착할 때 쯤 기차에서 노래가 나오는데 그게 원주민들 노래라고 하더라구요. 조금 중독성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ㅎ)










타이루거 협곡을 투어하시다보면 원주민들이 운영하는 가게에 들리시는 경우도 있으실 겁니다. 대만정부는 본래 대만 섬의 주인이었던 원주민들을 보호하고자 원주민들만 이곳에서 가게 영업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고 합니다. 저 또한 원주민들이 운영하는 가게로 가서 망고주스를 먹었던 기억이 나네요! (다음번에 또 갈 기회가 있으면 원주민 분들과 사진을 한 번 같이 찍어봐야겠어요!)



또한 원주민들을 기리기 위해서 고궁박물관 옆에 원주민 박물관을 따로 설립하기도 했는데, 그건 '어쩌다가 중화민국(오늘날의 대만)이 중화인민공화국(오늘날의 중국)에게 밀리게 된 것일까?'편에서 따로 언급하겠습니다!


 화롄투어에서 만나볼 사람들은 원주민 분들 뿐만 아니라 과거 장제석의 군인들도 만날 수 있는데, 그것도 나중에 '어쩌다가 중화민국(오늘날의 대만)이 중화인민공화국(오늘날의 중국)에게 밀리게 된 것일까?'편에서 설명드리겠습니다!


그럼 담에 뵈요!


아! 그리고 그냥 보너스로 화롄투어 중 하나인 '청수단애'에서 찍은 사진 몇 장 올려 놓을께요! 화롄투어 갈때는 꼭! 꼭! 날씨 좋을때 가세요!









[참고자료 사이트 (이미지 포함)]

https://namu.wiki/w/%EB%8B%A4%EB%91%90%20%EC%99%95%EA%B5%AD

https://ko.wikipedia.org/wiki/%ED%83%80%EC%9D%B4%EC%99%84_%EC%9B%90%EC%A3%BC%EB%AF%BC )


안녕하세요?


최근 대만의 한국 여행객 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얼마전에는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온라인 상에서 미리 양식을 작성하면 이미그레이션을 자동으로 통과시켜 주는 제도를 시행함으로써 한국인 여행객을 배려하는 움직임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보통 대만을 가는 이유는 맛있는 음식들, 같은 문화권에서 느끼는 편안함 그리고 값싼 비행기 값 때문에 인기가 있는 장소입니다.


하지만 대만이라는 곳에 대해서 알면 알 수록 더욱더 가고 싶고, 한국인으로써는 가야할 이유가 많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대만편에서는 대만에 대한 역사를 살펴보면서 나중에 대만에 도착하셨을 때, 그곳에서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하시길 바랍니다.





Q1. 타이루거(태로각) 협곡에서는 왜 원주민들만 영업을 할 수 있을까?

Q2. 오스만 제국의 번성이 대만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Q3. 타이페이와 타이난에는 왜 제국주의 시대의 선봉장인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숨결이 있을까?

Q4. 하멜표류기는 왜 대만에서 시작된 것일까?

Q5. 현재 대만의 대부분은 왜 한족(본성인)일까?

Q6. 장제스는 누구일까? 

- 청나라 다음이 왜 중화인민공화국(오늘날의 중국)이 아니고 중화민국(오늘날의 대만)이었을까? 

- 중화민국(오늘날의 대만)은 어떻게 최초의 민주국가가 됐을까?

- 중화민국(오늘날의 대만)이 대한민국 독립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어쩌다가 중화민국(오늘날의 대만)이 중화인민공화국(오늘날의 중국)에게 밀리게 된 것일까? 어쩌다가 UN에서 탈퇴된 것일까?

- 현재 대만정부는 대만의 명소 중 하나인 '중정기념당'의 권위를 스스로 떨어뜨리려 하는 것일까?

Q7. 과거 대만사람들은 왜 반한 감정이 있었을까?

Q8. 대만에서는 왜 망고빙수가 유명한 것일까?

센과치히로는 왜 행방불명된 것일까?

Q9. 첨밀밀 ost로 유명한 '월량대표아적심'은 왜 홍콩이 아닌 대만에서 들어야 되는 걸까?

 

위와 같은 질문을 차례로 포스팅 하면서 대만의 역사를 되돌아 보고 아울러 극동아시아의 근현대사까지 둘러보면서 유익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이런 블로그를 쓰겠다고 결심하고 여행한 첫 장소가 대만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블로그를 기획한 것 자체가 역사에 포인트를 두었기 때문에 역사적인 장소들만 돌아다니면서 감상했는데 지금와서 블로그를 써보니 '교통수단 이용방법', '조심해야될 부분' 등을 다루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다음 여행지에서는 그러한 정보들도 다룰 예정입니다. 그리고 대만을 다시한 번 가게되면 그때는 꼭 추후에 해당 사항들을 업로드하겠습니다!


그럼 과거여행 즐겁게 하세요!

 

아래 파일은 제가 간략하게 대만역사에 대해서 정리한 pdf 파일이니 참고하셔도 좋을 것 같아요!


대만역사(1).pdf

대만역사(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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