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시간여행자에요!
오늘은 과거 대만사람들이 반한감정을 가진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보도록 할께요! 이번장에는 대한민국과 대만의 관계를 시기별로 나누어 설명하려고 해요~
1) 초기
본래
중국과 북한이 공산주의 연합이었고, 한국과 대만이 민주주의 연합이어서 전우애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대만을 자유중국 (중화민국) 이라고
불렀고, 중국을 중공(중화인민공화국)이라고 불렀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중국’이라고
하면 ‘중화민국’ 즉 대만을 일걷는 말이었다고 하네요.
단교 직전인 1990년 기준으로,
서울에는 미국, 소련, 프랑스, 서독, 영국, 일본, 이탈리아 등 이른바 세계 열강의 대사급 외교관이 상주하여, 중화민국
외교관이 대사 자격으로, 강대국 대사들과 대등하게 접촉하는 유일한 공간이 대한민국 이었기 때문에 한국과 대만의 관계는 상당히 끈끈했다고 하네요.
2) 대만 UN 탈퇴
1945년부터 한때 대만은 UN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 중 하나였지만, 1971년 10월 25일 중화인민공화국이 UN에 공식 가입하게 되면서 UN 총회의 투표 결과에 따라 결국에는 중화인민공화국에게 상임이사국 자리를 내줘야 했고 UN에서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탈퇴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UN 총회에는 중화민국 축출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상임이사국 지위
획득을 지지하는 알바니아의 결의안과 그것을 반대하는 미국의 안이 동시 상정되었는데, 서방 국가들(캐나다, 프랑스, 이탈리아
등)도 다수가 알바니아의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져 미국에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때는 아직 중국의 저력이 핵무기 정도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어느
정도 예견되기도 한 결과인것이, 프랑스는 이미 1960년대에
중국과 수교했다. 당시 미국은 중국을 대표하는 권리는 포기하되 대만(Taiwan)
지역의 주권국가로서의 회원국 지위는 유지하는대만 공화국? 타협안을 제시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나라들이 반대하고 중화민국도 거부하여 무산되었고, 표결 직후 UN 총회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합법적 권리 회복을 골자로 하는 '제2758호 결의'가 찬성 76, 반대 35, 기권 17로 통과되고, 그
직전에 중화민국이 스스로 UN 탈퇴 선언을 함으로서 UN 상임이사국
지위는 물론 회원국 지위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즉, 서방국가들
또는 UN 가입국들이 중국의 영향력 (중국에 자신들의 기업들을
투자 유치 등) 을 우선으로 하여 대만을 버린 것이라 할 수 있는데요. 사실, UN에서는 중공의 UN 가입을 반대하다가 중소결렬 (공산주의의 해석차이 + 한국전쟁에 소련이 중국을 제대로 돕지 않음 (소련은 남한 침략에
회의적이었음)) 이후에 미국을 위시한 서방국가들이 소련 견제를 위해서 중국과 손 잡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리면서 정책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국제 정세의 변화는 대만을 중국의
정통 정부로 인정하고 국교를 맺어온 한국에게도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특히 한국전쟁의 일방 당사자
가운데 하나였던 중국이 UN에 가입하고, 그것도 상임이사국이
됨으로서 한국전쟁 휴전 협정이 무효화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한국 사회에 밀어닥치기도 했다. 그걸 빌미로
유신헌법이 만들어져 제4공화국이 출범하기도 했습니다.
3) 한중 수교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은 이토록 친밀했지만 1971년, 중화민국이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와 전 중국의 대표자격을 빼앗기며 UN에서
추방당할 때(대만 축출)는 도움을 주지 못했는데요. 그 이유는 당시 한국은 공산권의 반대로 참관국이었을 뿐, 가맹국이 아니라 반대표를 던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1988년에 출범한 노태우 정부가 공산권과 외교 관계 개선에
적극 나서면서 한국-중국 및 한국-대만 관계에 변화의 기류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소위 북방정책으로 표현되는 이러한 외교 노선에 따라 한국은 헝가리,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동구권 국가들과 수교한 데 이어 1990년 10월에는 공산주의의 종주국 소련과 수교함으로써 북방정책의
정점을 찍게 되는데요. 특히 중국은 한국과 수교할 경우 이에 반발한 북한이 친소로 기울어질 것을 염려하여
한중 수교에 미온적이었는데, 1991년 8월 쿠데타 이후
소련이 급속히 와해되면서 상황이 급변하게 됐다고합니다.
한국은 노태우 정부의 사실상 임기 마지막 해인 1992년 안에 중국과 수교함으로써 북방정책의 대미를 장식하고 싶어했고, 중국
역시 한국과 수교함으로써 대만을 아시아에서 완전히 고립시키게 되었습니다. 물론 한중 수교가 가시화되면 북한과
대만이 견제에 나설 게 불 보듯 뻔한지라 한중 외교 당국자들은 북한과 대만을 설득하여 양해를 구하는 절차를 생략하고 비공개로 직접 수교 교섭을
벌여야 했습니다.
4) 단교
1992년에 대한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 교섭을 할 때 중국 측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중국원칙을 들이대며 대만과의 단교를 조건으로 내걸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중국의
외교에서 최우선 원칙으로 대한민국에만 요구한 것은 아니였으며, 당장 미국도 1979년 중국과 수교하면서 중화민국(대만)과는 단교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은 당시 중화민국에 있어 최후의 대국이었는데요. 중화민국 외교관이 외교부장(외무부 장관)으로 가는 엘리트 코스의 마지막 관문이 바로 주한대사였다고도 합니다.
그렇지만
한중수교는 한국의 입장에서는 북한에 대해, 중국의 입장에서는 대만에 대해 외교적 판정승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양국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는 부분도 있었기에 언젠가는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한국과 대만의 관계가 틀어진 것은 단교가 되고
나서부터이다. 마침내 중국과의 수교가 정식으로 맺어지기 일주일 전인
1992년 8월 15일. 결국 한국 외무부는 중화민국 대사를 소환해 비공식적으로 중국과의 수교, 중화민국과의
단교 계획을 밝힙니다. 한편 첸푸 외교부장은 주한 대사관으로부터 한중수교 합의를 통보받은 후 8월 19일 입법원 대표들을 외교부로 불러 한국이 중국과 수교하고 대만과 단교한다는 사실을 통지하고 이에 동요하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하지만 입법원 의원들은 외교부장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이를 즉각 언론에 누설하였고, 대만 내 여론은 격분했다. 한국 정부는 대만 소식통을 통해 한중수교
뉴스가 전해지자 처음에는 즉각 부인했다가 결국 하룻만에 이를 번복하여 한중수교 사실을 시인했는데, 이
때 대만에 유학중이던 한국외대 중국어과 학생이 대만인들에게 폭행을 당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8월 21일 공식적으로 중화민국에게 단교 문서를 전달하려고 했는데, 중화민국측에서 선수를 쳐
대한민국과의 단교를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중국과 수교를 맺은 24일, 중화민국 대사관에 72시간 내에 국기와 현판을 내리고 철수해줄 것을
요구했고, 이후 중화민국 대사관은 6시간 만에 국기 하강식을
갖고 한국을 떠났습니다. 실제로 당시 중화민국 국적의 화교들이 눈물로 진 대사를 배웅했으며, 일부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거리에 나가 한국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고 합니다.
5) 중국
중화인민공화국을 국가승인하지 않았던 한국이 1988년 한국이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호칭을 중공에서 중국으로 변경했을 때, 중화민국 측은 항의했습니다. 중화민국이 중국 대륙의 정통 국가라는 원칙을 훼손하기 때문입니다. 여러
번 강조되지만, 여타 소국들과 달리 한국은 차례 차례 단절되어 가는 중화민국 외교에서 최후의 대국이었기에
그러한 조치가 중화민국 입장에서는 중대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는데요. 아래와 같은 연설은 당시의 대만의 입장을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한·중 외교관계 수립으로 대만은 이번에 세 번째 타격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는 1971년 유엔에서 쫓겨난 것이고, 두 번째가 미중 수교, 세 번째가 한중 수교라는 것입니다. - 첸지천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장의 국제정세 문제에 관한 연설(’92. 09.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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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외의 반한감정 요소들
다음장에서 일본과 대만과의 관계를 설명할텐데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대만은 일본에게 굉장히 긍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부분이 반한감정을 부추기는 또하나의 요소라고도 하는데 더욱 중요한 요소는 대한민국의 성장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사실 대만은 우리나라보다 경제적으로 굉장히 앞선 나라였는데요 (한국전쟁이후에는 모든 나라가 대한민국보다 잘 사는 나라였죠;;). 대한민국이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하자 상대적으로 대만이 뒤쳐지는 모습에 반한감정이 생겼났다고해요. 물론 대만과의 수교를 단절한 것이 큰 요소였겠지만, 앞서 언급했던 여러요소들이 결합하여 반한감정을 부추기는 역할을 했다고해요
7) 현재
하지만 요즘 세대들은 반한감정이 있었나 할정도로 대만과 한국의 관계는 우호적으로 변했습니다. 특히 요즘에는 Kpop의 영향으로 요즘 세대들은 서로에 대한 호감도가 점차 올라가는 중이라고해요~ 2018년에는 더욱더 교류를 활발하게 하기위해서 한국인들은 입국시 혜택을 주는제도도 생겼다고하는데요. 여행했을 당시에도 반한감정같은게 뭔가할 정도로 사람들이 친절했고 아무튼 너무 좋았습니다~
외국공항에서 한글이 적혀진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요?????????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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