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DNN을 학습시키기 전에 왜 데이터를 전처리해주어야 하나요?

 

 

안녕하세요~ 이번시간에는 DNN 모델이 학습을 효율적으로 하기위해 필요한 정규(Noramlization; 정규화) 대해서 알아보도록 할거에요~ 흔히 Data Preprocessing(데이터 전처리)를 위해 하는 방법론으로 쓰이고 있는데, 이번글에서 data preprocessing과 normalization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할게요. 

 

 

 

 

<1.Normalization(정규화)란?>

 

먼저 정규화의 사전적인 의미는 아래와 같아요. 

 

'어떤 대상을 일정한 규칙이나 기준에 따르는 '정규적인(정식으로 된 규정이나 규범)' 상태로 바꾸는 행위

 

이미지를 예로 들어볼께요. 이미지에서 하나의 pixel은 보통 0~255의 range(범위)를 갖고 있어요. 가끔 이러한 범위가 수치계산에 비효율적인 경우가 있어서 비율에 맞게 0.0~1.0 단위로 축소시키기도 합니다.

 

 

 

 

<2. Normalization이 필요한 이유>

 

앞서 Normalization이 필요한이유가 DNN의 효율적인 학습 때문이라고 말씀드렸는데요.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효율적인지 예시를 통해 알아보도록 해보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x1, x2라는 데이터를 통해 학습을 시킨다고 해볼께요. x1변수의 데이터 범위는 (1~9)인 반면에 x2의 범위는 (-5000~9000)이네요. 이렇게 입력데이터들끼리의 범위차이가 심하면 어떤 현상이 발생할까요?

 

          

                    <사진1>                               <사진2>        

 

문제정의를 회귀(regression)문제라고 하고, MSE를 통해 문제를 풀어봅시다. (우리가 원하는 target 값이 45000이라고 가정)

 

 

x1과 x2에 대한 cost function을 그려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실제 값의 범위를 그려보면 아래 사진들의 빨간색 그래프처럼 한쪽은 굉장히 가파른 모양을 갖고, 다른 한쪽은 완만한 모양을 지니고 있어요. 

   

     

<사진3>                                                          <사진4>

 

위의 두 개의 독립변수에 대한 가중치 cost function을 결합하면 아래와같은 모양이 나오게 됩니다.

(Note: 아래에는 w1, w2 값이 0,0 일 때 최소값을 갖는것 처럼 나오는데, 정확하게는 w1=4500, w2= 5 일 때 최소값을 갖습니다. 3D 그림으로 설명하려다가 이 부분을 고려 못했네요 ㅜㅜ;; )

 

 

      

<사진5>

 

위의 그래프를 2D로 표현해보려고 합니다. 위의 그래프를 위에서 아래로 바라본다면 아래와 같은 그래프 모양을 형성하겠죠.

 

<사진6>

 

그런데 이때 문제는 cost value를 알아볼수가 없네요. 그래서 아래와 같이 색으로 cost value를 표현해주고 등고선형태의 모양으로 3D cost function을 2D cost function으로 표현해 줄 수 있게 됩니다. (Note: 아래에는 w1, w2 값이 0,0 일 때 최소값을 갖는것 처럼 나오는데, 정확하게는 w1=4500, w2= 5 일 때 최소값을 갖습니다. 3D 그림으로 설명하려다가 이 부분을 고려 못했네요 ㅜㅜ;; )

 

       -->       

(Note: 아래에는 w1, w2 값이 0,0 일 때 최소값을 갖는것 처럼 나오는데, 정확하게는 w1=4500, w2= 5 일 때 최소값을 갖습니다. 3D 그림으로 설명하려다가 이 부분을 고려 못했네요 ㅜㅜ;; )

 

<사진7>                                                     <사진8>

 

 

자 그럼 이제부터 문제가되는 부분을 살펴볼게요.

 

앞서 Weight update 방식을 보면 W1, W2에 적용되는 learning rate은 같아요 (항상 같은 상수값이죠).

 

 

그런데, 아래와 같은 cost function을 형성했을 때에는 learning rate이 W1 cost function 기준에서는 적절할지 몰라도 W2 기준에서는 굉장히 큰 값이 될 수 있기 때문에 overshooting이 일어날 확률이 커지게 됩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이 비효율적으로 지그재그로 학습하게 됩니다. 

 

<사진8>

 

 

 

<사진9>

 

 

 

"모든 가중치에 동일한 Learning rate(상수 값)이 적용"된다는 조건 때문에 입력데이터들의 범위를 모두 동일화해줄 필요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죠. 그래서 입력되는 독립변수들을 가능하면 같은 범위로 Normalization하는 아이디어가 적용되었고, 이것이 Data Preprocessing (데이터 전처리) 개념으로 쓰이게 된 것이랍니다!

 

이렇게 Normalization을 적용하게 되면, 아래와 같이 더 효율적으로 DNN이 학습을 할 수 있게 되는것이죠! (위의 예시와 아래그림이 일치하는건 아니에요. 그냥 Normalization하면 cost function이 어떻게 바뀌고, 어떻게 효율적으로 학습할 수 있을지에 대한 개념만 이해하시면 됩니다~)

 

<사진10>

 

 

 

 

<3. Normalization 실습>

 

마지막으로 Normalization이 적용되는 방식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할게요.

 

이전에 제가 PPT로 정리해 두어서 캡쳐만 하고 사진으로 올리드록 하겠습니다 ;; ㅎㅎ

 

 

 

 

 

 

 

 

 

이번장에서는 데이터 전처리를 해야하는 이유에 대해서 알아보았어요!

 

다음장에서는 Batch Normalization을 배우기 위한 사전지식인 Mini-Batch 학습 방법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할께요!!

 

 

 

 

 

 

 

[사진래퍼런스]

사진1

https://stackoverflow.com/questions/37734655/neural-network-solving-xor?noredirect=1&lq=1

사진2, 8

https://www.youtube.com/watch?v=1jPjVoDV_uo&list=PLlMkM4tgfjnLSOjrEJN31gZATbcj_MpUm&index=18

<사진10>

https://medium.com/@pnkshir/concept-of-normalization-427108d1ccfa

<실습사진>

http://aikorea.org/cs231n/neural-networks-2-kr/

 

안녕하세요~ 시간여행자에요!


이번글에서는 홍차가 왜 영국의 최대 수입품이었으며 미국의 독립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 설명해보도록 할께요~~~




<1. 캐서린 공주와 영국 상류사회>


영국 국왕 찰스 2 (1630~1685)는 시집을 간 포르투갈의 캐서린 공주가 결혼 지참금(여성이 시집갈 때 친정에서 가져가는 돈이나 물건, 즉 남편에게 혼수품을 주는 개념)으로 차와 설탕을 가지고 갑니다. 캐서린 공주는 차에 설탕을 넣어 마시는 방법을 영국 상류사회에 유행시키게 했는데요. 


이 후 점차 상류사회에서 일반인들에게까지 차가 확대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영국사람들은 아침과 저녁 두 끼니만 먹고 아침 메뉴로는 비교적 간단한 빵, 계란과 맥주를 즐겼고 저녁은 일과를 마친 뒤 고기를 배불리 먹곤 했다고 하는데요


따라서 저녁 식사 전까지 상당히 긴 시간 동안 배고픔을 참아야 했는데 1820년 영국 베드포드 공작부인이 차와 더불어 샌드위치나 스콘 등의 가벼운 식사거리를 준비하여 친구들을 초대해 티파티를 열었던 것이 에프터눈티의 시초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점차 집밖 정원에서 테이블과 의자를 놓고 은으로 만든 티포트와 간편한 식사거리를 준비하여 사교 모임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죠.





<2. 영국 커피농장의 실패>


그 외에도 17세기부터 프랑스와의 주도권 다툼이 커피라는 작물로 넘어오면서 영국 커피농장은 대부분 실패하고 프랑스 식민지에 있던 커피농장들은 크게 성공을 하게 되는데요. 이에 영국에서는 중국과의 ''수입을 거의 독점하다시피하여 유럽에 차문화를 유행시키면서 커피로 인한 손실을 차로써 만회를 하게 됩니다


1850년경에는 일반인들에 까지 널리 퍼지게 되면서 영국의 고유한 문화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티타임을 중심으로 일찍부터 사교문화를 꽃피워 왔던 영국은 하루 7~8회 정도 티타임을 가질 만큼 홍차를 사랑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영국은 청나라로부터 엄청난 양의 차를 수입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 홍콩이 있는 광둥성 근처에서 차를 수입한걸까요??


광동(광둥()) 13행이란 청나라가 서양과 교역을 허가한 13개 상점으로 동, 서양의 문화가 교류하는 교차점이라는 뜻인데요. 13개의 주요상점들에는 은행(은을 거래하는 곳; 은행의 어원), (홍차), (도자기), (향신료)행 등이 있었는데, 이러한 수출품들은 중국에서 홍콩을 들렸다가 서유럽으로 가게되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은 돈이 되었던 것이 였던 것이죠.




<3. 애프터눈 티와 보스턴 차 사건>


홍차수입으로 인해 힘들어진 재정난을 막고자 당시 미대륙으로 진출했던 영국은 미국에 차문화를 전파시키고, 파는 차에 세금을 크게 부과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영국인들은 애프터눈 티는 매일 마시니까 세금을 낼 수밖에 없겠지라는 꾀를 낸것이죠.


세금을 내라고 했다고 반발했던건 아니었습니다. 결정적인 이유는 관세를 매기는 방식 때문이었죠. 원래 관세를 때려도 영국땅이라는 개념에서는 국내관세를 매겨야되는데 영국의회는 미대륙에 국제관세를 매겨 엄청난 이득을 취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미국영토에 있는 주민들이 보스턴항에 정박한 배에 실려 있던 홍차 상자들을 바다에 버리면서 보스턴 차사건(1773)’이 발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미국 독립운동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아메리카노가 탄생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홍차의 수입이 어려워진 미국은 홍차대신 커피를 마시게 되었고, 커피가 홍차를 대신하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홍차를 마시던 습관이 있어서 짙은 에스프레소 대신에 에스프레소에 물을 첨가해 묽게 하여 홍차의 진하기와 비슷한 아메리카노를 즐기게 되었다고 합니다이 때부터 미국은 최대 커피 소비국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번장에서는 여행객들이 홍콩을 방문하면 꼭 애프터눈 티를 마시고 오시기에 홍차에 대한 재밌는 에피소드를 알아보았어요~


다음장에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영국이 홍콩을 어떻게 지배했는지 설명해보도록 할께요~!!!





[글 래퍼런스]

http://news.mk.co.kr/newsRead.php?no=988681&year=2014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anubecafe&logNo=220838475735&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


안녕하세요~ 시간여행자에요!


이번에는 영국이 청나라에게 아편을 판매하면서 어떤 사건들이 일어났는지 알아보도록 할거에요!






<1. 영국의 동인도회사 설립>


유럽열강들과 경쟁하던 영국은 인도에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게 됩니다. 광동 성 광저우에 무역항을 설치한 후 무역을 해나가긴 했지만, 1793년 청나라 황제 건륭제는 영국에게 원하면 문호는 열어주는데 너희 물건을 필요하지 않다고 이야기 합니다


<사진1>



이렇게 이야기 했던 이유는 당시 영국이 중국에 수출하려고 했던 품목은 면화시계보석모직물 등이고영국이 중국으로부터 수입하려고 했던 것은 도자기비단은이었기 때문인데요그런데 당시 중국 중하류층들이 입고 있던 의복이 면화베였으며 상류충의 의복이 비단이었기 때문에 영국의 수출품이 매력이 없던 것이었죠. 반대로 차비단은 영국인들에게는 필수품이었지만요당시 광둥 13행의 주요 상점들 은행(은을 거래), 차행(차를 거래), 도행(도자기를 거래), 약행(약을 거래이 있었다고 합니다.







<2. 청나라에게 아편판매>


이전글에서 설명했듯이 당시 영국은 '은'을 모으는데 혈안이었지만 중국과의 교역에서 오히려 은이 유출되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중세 유럽에서는 실크로드(비단길: 중국에서 중앙아시아, 인도로 이어지는 교역로를 통해 거래되던 교역품이 주로 비단이었던 것에서 유래) 를 통해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를 비롯한 갖가지 수입 명품을 사기 위해 금과 은을 지불하면서 금속화폐를 탕진했기 때문이죠. 그 중에서 특히 은의 유출이 컸는데, 그 이유는 은이 유럽에서보다 중국에서 상대적으로 고평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전글인에서 설명드렸듯이 은이 부족한 유럽인들은 노예와 마약을 불법적으로 거래하면서 수익을 높이게 됩니다. 그래서 아프리카들을 정복하고 사람들을 노예로 삼기시작했다. 그리고 영국은 마약을 국가수출품으로 만들어 수출하기 시작합니다


인도의 동인도회사에서 인도산 양귀비를 싱가포르에서 제조해서 부패한 청나라 관료들의 도움을 받아 중국에 판매하기 시작하죠. 그외에 당시 영국에 대한 중국의 최대수출품은 차()였고 (왜 차가 최대 수출품이었는지는 다음장에서 설명할께요!), 영국의 주요수출품은 모직물과 인도산 면화였습니다


양국의 무역수지는 중국의 수출초과 상태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영국으로서는 차 수입을 결제할 은()이 부족하게 되었죠. , 차를 구입하는데 은을 모두 써버려서 국가에 경제에 큰 타격을 입게 된 것입니다. 이에 따라 영국은 중국에 아편을 수출해 무역적자를 해소하려 했습니다







<3.아편전쟁의 시작과 난진조약>


당시 청나라에서는 담배도 금지가 되었고, 빈부격차도 극도로 심했기 때문에 사회가 절망하게 되자 도박과 마약이 흥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영국인들이 청나라인들에게 아편을 판매하기 시작했죠. 하지만 나중에 문제가 되자 청나라 황실에서는 임칙서를 보내 아편거래를 못하게 만들었죠. 당시 임칙서는 영국에서 온 마약을 몰수해 바다에 투척했습니다.


<사진2>



 이러한 일을 겪은 영국은 1차 아편전쟁 (1840)을 일으키고 압도적인 군사 기술력으로 청나라를 몰살시키게 됩니다. 이 전쟁은 1842년에 영국의 승리로 끝났고, 난징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난징조약으로 영국은 홍콩섬을 할양받고,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등 다섯 개 항구를 강제적으로 개항시키게 됩니다.



난징조약 - 난징 조약(南京條約, 1842 8 29) 1840년부터 1842년까지, 2년간 벌어진 제1차 아편 전쟁을 끝내기 위해 1842 8 29일 청나라와 영국과의 사이에 맺은 불평등 조약


1.양국은 평화, 친목을 유지하며 상호간 재산·생명의 보호를 받는다.

2.청나라와 영국 두 나라 관리는 대등한 자격으로 교섭을 한다.

3.홍콩 섬을 영국에 할양한다.

4.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등 다섯 개 항구를 개항한다.

5.개항장에 영국인 가족의 거주를 허가하고, 영사관을 설치한다. (조계를 허용한다.)

6.전비배상금으로 1,200만 달러와, 몰수당한 아편의 보상금으로 2100만 달러를 영국에 지불한다.

7.행상(行商) , 공행(公行)과 같은 독점상인을 폐지한다. 또한 공행이 영국 상인들에게 진 빚에 대한 보상금으로 300만 달러를 지불한다.

8.수출입 상품에 대한 관세율은 양국이 협의하여 결정한다.




사실 1차 아편전쟁을 통해서는 홍콩섬만 할양받고 현재 홍콩을 이루고 있는 나머지 구역을 할양받지 못한상태였어요.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1차 아편전쟁을 통해 홍콩섬을 할양받은 거에요. 실제로 홍콩은 홍콩섬과 구룡반도, 신계로 구성되어있는데요. 그럼 어떻게 나머지 부분들을 할양받을 수 있었을까요?


   

<사진3>                                                       <사진4>






<4. 2차 아편전쟁(애로호 전쟁)>


앞서 영국이 홍콩섬을 할양받았다고 했죠? 영국은 1차 아편전쟁 후 홍콩을 기점으로 무역을 활발히 펼치려 했지만 청나라는 경제적으로 자급자족 성격이 강했습니다. 또한 중국의 면포는 품질이 우수하여 영국의 주력상품인 모직물과 인도산 면화는 상대가 되지 못했던거죠. (당시 프랑스도 청나라에서 무역성과가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1차 아편전쟁 이후 광둥을 중심으로 영국에 대한 항쟁운동이 전개되었는데요. 1856년 10월 청나라 관원은 해적선으로 보이는 애로호라는 선박을 단속했습니다. 그런데 해당 선박은 중국인 소유의 해적선이었는데, 배에는 영국국기가 달려있었다고해요. 본래 그 배에는 중국인선원 13명과 영국인 선장 1명이 있었는데 체포시에는 영국인 선장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체포과정에서 청나라 관료가 영국국기를 불태워 바다에 던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영국은 이에 대해 국가모독의 죄명을 씌워 배상금과 사과문을 내라고 하였으나 당시 청나라는 해당 배는 중국인 소유고 해적선 자체가 불법이니 배상과 사과를 할 필요가 없다며 강하게 일축했어요. 이를 빌미로 영국과 프랑스는 연합군을 형성하고 1857년 12월 광저우를 점령하고 청나라 관료를 포로로 잡습니다.


<사진5>



이렇게 양측이 대립하는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본격적인 2차 아편전쟁을 벌여 영국, 프랑스 연합이 승리하게 됩니다. 그 결과 1858년 톈진조약을 맺게됩니다. 


1. 전쟁에 대한 배상금

2. 외교관을 베이징에 주재하게 할 것

3. 외국인의 중국 여행과 무역의 자유 보장

4. 기독교 포교의 자유와 선교사 보호

5. 뉴장(만저우), 덩저우(산둥반도), 한커우(장강 연안), 주장(장강 연안), 전장(장강 연안), 타이난(타이완), 단수이(타이완), 차오저우(광둥성 동부, 이후 샨토로 변경), 치웅저우(하이난 섬), 장닝(장강 연안) 등 10개의 항구를 개방할 것








<3. 1차 베이징 조약 & 2차 베이징 조약>


1) 1차 베이징 조약

청나라 조정에서는 톈진조약이 불평등 조약이라고 주장하면서 영프 연합군을 다시 방해하게됩니다. 그러자 영프 연합군은 다시 베이징까지 밀고 올라가 베이징까지 점령하게 됩니다. 이때 1859년 베이징 조약을 맺게 되는데, 베이징 조약을 통해 구룡반도(Kowloon)를 할양받게 됩니다.


 

<사진6>



2) 2차 베이징 조약

청일전쟁 이후 영국이 홍콩 방위 목적으로 중국과 교섭을 벌이게 됩니다. 이때 2차 베이징 조약(1898)을 맺고 홍콩의 나머지 부분인 신계(The New Territories)를 할양을 받게 됩니다.



이로써 영국에 의한 홍콩 지배는 1842~1997년까지 진행되게 됩니다. 




다음글에서는 잠시 홍차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할꺼에요! 재미있는 스토리가 있으니 기대해주세요!






[사진 래퍼런스]

사진1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a/print.do?levelId=ta_h62_0030_0010_0010&whereStr=

사진2

http://study.zum.com/book/12725

사진3

https://en.wikipedia.org/wiki/Hong_Kong

사진4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alname32&logNo=221638298615

사진5

http://m.blog.daum.net/guidesyj/289

사진6

https://namu.moe/w/%ED%99%8D%EC%BD%A9/%EA%B4%80%EA%B4%91



[글 래퍼런스]

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C%98%81_%EC%A0%9C%EA%B5%AD

http://news.mk.co.kr/newsRead.php?no=988681&year=2014

https://brunch.co.kr/@rlfrjsdn/26

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D%8E%B8_%EC%A0%84%EC%9F%81

https://ko.wikipedia.org/wiki/%EB%82%9C%EC%A7%95_%EC%A1%B0%EC%95%BD


안녕하세요! 시간여행자에요~


영국이 홍콩을 지배하게 된 이유는 아편전쟁 때문이에요. 그런데, 이 아편전쟁은 왜 일어난 것 일까요?

그 이유를 알기위해서는 화폐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번 장에서는 화폐의 역사를 통해 아편전쟁이 일어난 이유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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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래 글들은 대부분 "TVN 어쩌다 어른; 조승연 작가편; 화폐의기원"이라는 곳에서 시청하면 훨씬 이해도 잘되고 생동감 있게 내용을 들으실 수 있으실거에요. 그래서 꼭 한 번 시청하시는 걸 추천드려요!


작가님께서 오마이스쿨과 함께 따로 유튜브에 무료영상을 올린 것 도 있으니 시청하시면 더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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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의 역사]


<1. 최초의 화폐; 인간>


대도시가 생기기 전에는 서로 물물교환이 주가 되었어요. 한쪽에서 돼지가 필요해서 돼지를 빌리면, 돼지를 빌려준 쪽에서 나중에 쌀이 필요하면 쌀을 빌리는 식이었죠. 하지만,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시작되고 대도시가 생기면서 익명성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이는 공동체의 개념이 약화시켰어요. 때문에 옆에 사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 경우도 생기고, 어느덧 이사를 해 사라져 버리는 경우도 생기는 것이었죠.


그래서, 이때부터 점토에 빌려주고 빌린 것들에 대해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점토에 기록하고 들고 다니기가 너무 무거웠기 때문에 나중에는 토큰같은 것을 실로 엮어 팔찌로 만들어 들고 다니면서 자신의 물건을 빌려간 사람에게 보여주게 되었어요


하지만, 이 당시에도 빚을 갚는 형태는 물물교환이었다. 그래서 A B C에게 양10마리를 빌려줬는데, C A에게는 쌀 5포대, B에게는 쌀 7포대 주는일이 생겨 갈등이 벌어지는 일이 생겼다. 그래서, 이러한 불공정 거래를 없애기 위해 도량형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메소포타미아는 소한 마리를 빌리면 소 한 마리를 빌렸다고 하지말고 은 50g을 빌렸다고 기록하라고 명명하면서 가치에 대한 평가를 무게로 통일하게 된 것 이죠


그런데 당시 은 워낙 귀했기 때문에 화폐로 기능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도량형이 발표된 후 빌려준 물건을 갚지 못했을 때에는 갚지 못한 집안의 딸을 납치하거나 가장을 죽였다. , 은이 담보가 아닌 인간이 담보인 사회였던 셈이죠 (인간화폐의 시대 도래).






<2. 최초의 이자개념; 노예제도>


인간화폐가 나중에 노예제도로 발전하게 되는데, 그것에 크게 기여한 것이 지구라트라는 곳이에요지구라트라는 곳은 흉년에 대비하기 위해 비상식량을 저축하는 곳이자 신전역할을 하기도 했는데요. 당시 메소포타미아인들은 강 주변에서 살면서 농경사회를 이루었는데, 당시 홍수와 가뭄을 피하기 위해 지구라트에 곡식을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고해요


가뭄이나 홍수가 들어 주민들이 곡식을 재배하지 못할 때면 종자 씨를 구하기 위해 지구라트에가서 빌리고는 했는데, 지구라트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종자 씨 하나를 주면 다섯 알갱이가 나오니, 나중에 갚을 때 두 알갱이로 갚어라라는 이자 개념을 도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보통 흉년과 풍년이 번갈아 일어나지 않고 흉년이 연달아 일어나는데, 이런 경우에는 주민들이 이자만 늘어나는 사태가 발행하고 빚이라는 것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노예가 되기 시작하게 되었는데요. 이것을 통해 노예 사회 (1% 지배계층, 99% 노예) 가 시작되기 시작하게 됩니다. 당시에도 여성은 여전히 아버지의 소유재산으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빚이 많아져서 파산을 하게 되면 그 집안 여성들을 데려와 윤락업소에 판매를 하게 됩니다





<3. 군사화폐 그리고 세금의 시작; 은> 


노예 화폐시대에는 굉장히 긴 주기를 가지고 노예들이 한 번씩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노예가 화폐인 사회는 크게 한 번씩 기반이 흔들리곤 했어요. 그래서 왕들은 시민계급을 대규모 군대조직으로 만들어 반란을 일으키는 노예들을 죽였습니다


이러한 반란을 막는 또 하나의 방법은 노예를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었어요. 알렉산더 대왕은 이때부터 은을 화폐로 만들어 시민계급에게 뿌림으로써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해주면서 군대조직을 더 강화시켰어요. 당시 '은'이 귀했기 때문에 이때부터 다른 나라의 신전을 공격하는 정복전쟁(이집트, 페르시아 등)을 일으킵니다 (보통 신전에 많이 '은'이 있었다고해요). 알렉산더 대왕은 이 때부터 정복전쟁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티레, 이집트, 페르시아 등). 


약탈한 금은 보화는 녹여 동전으로 발행하기 되는데 이것이 최초의 금속 화폐에요. 당시 군사들은 소금(salt) or 은화를 봉금(salary)로 받았다 (소금은 생필품이었음으로 시장가치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은화가 온전히 화폐로 통용되지는 않았다고해요. 예를 들어, 고대 잉카부족에서는 딱딱한 은이 어떤 가치를 지니지 못했기 때문에 은화를 통해 거래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은화를 건내주면 옷, 식량 등을 사입거나 사먹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는데, 지배계층들은 이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 세금이라는 것을 은화로 징수하기 시작해서 모든 마을 부족 사람들이 은화를 사용하겠금 만들었어요. 그래서 모든 마을과 부족들이 군사들에게 생필품이나 무기 등을 팔 수있게 함으로써 모든 마을과 부족들을 보급처로 만들었죠. 이 후로, ‘이 화폐로써 자리잡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노예의 반란을 근본적으로 없애는 해결할 순 없었어요. 왜냐하면 빚이 생기는 이유는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자가 때문이에요. 또한, 농민들이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군대에 들어갔지만 긴 시간의 군대생활과 지속적인 이자로 빚이 늘어나는 이중고 생활을 겪게됩니다. 그래서 결국 군사화폐의 시대는 종결이 되었죠.





<4.어음화폐의 출현; 예수, 무하마드>


군사화폐의 문제는 이자로 인한 사회적 시스템의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이러한 이자를 받으면 안된다고 주장한 사람이 성자로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그 사람이 기독교의 창시자인 예수그리고 이슬람의 창시자인 무함마드’에요


예수는 고리대금 없자들을 내쫓으면서 이러한 스토리가 유럽전역에 퍼지게 됩니다. 그래서 당시 많은 대중들이 예수와 무함마드의 말을 따르고 그들의 행적을 기리기 위한 운동들을 했죠. 이자를 받는 장소인 신전(앞서 언급한 지구르타)을 파괴하고 예수와 무함마드가 한 말들의 일부분을 법제화 (ex: 성경-이자를 없애라) 하도록 주장하고, 종교화하기 시작했어요


은행역할을 하던 신전이 폐쇠되자 유럽은 금융업자들이 돈을 숨기게 되고 통화시스템이 무너지게되어 자급자족 사회인 봉건사회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이슬람은 어음이라는 제도를 통해 화폐제도를 유지하게 되는데요. 당시 어음은 지금 돈을 빌리고 나중에 돈을 갚겠다라는 약속증이었어요


어음을 돌려받을 때 수수료를 천원추가 하게 되는데 (사실 이것이 이자나 다름없지만), 당시 굉장히 괜찮은 아이디어였다고 합니다. 예를들어, A(이슬람) 상인이 B(유럽) 상인에게 어음을 돌려받으려고 할 때, B상인이 C(중국)상인에게 어음증을 내주었으니 C상인에게 어음증을 받고 자신(B(유럽)상인)에게는 그냥 물건을 주면 된다고 하는 식으로 진행되어 결국 이슬라 어음 시스템이 국제적인 화폐 시스템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상인들은 유럽과 중국의 중심점인 말레시아 말라카에 거대한 어음거래소 (유네스코) 를 설치하게 되고, 나중에 말레이시아가 강성해지자 어음거래소를 남쪽으로 조금 내려 쿠알라룸푸(중동 산업과 금융 중심가 됨) 에다 이전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이슬람은 신용거래를 한셈인데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모든 이슬람사람들이 메카에 가서 상인들의 신용에 대해 이야기 하기 때문에 신용을 지킬 수 밖에 없었다고해요. 이렇게 이자도 받지 않고 신용으로 거래하는 상인들이 존경받는 시대가 도래했고 알라바바나 신밧드라는 이름으로 남겨져 있었다고 하네요


하지만, 어음화폐는 개인이 화폐를 발행한 다는 단점이 있기 때문에 대규모 군대 조직이 생기기 어렵고 국방력이 약화 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단점으로 인해 서서히 아랍제국이 몰락하게 되고 어음화폐가 사라지게 됩니다.




<5. 유태인과 제국주의>


아랍에서는 어음화폐제도가 무너졌지만, 유럽인들이 어음화폐제도를 고리대금으로 악용하게 되요. 당시 유럽사회는 봉건제도로써 영주들과 계급제도가 있었는데 (귀족, 기사, 농민), 이슬람 국가들이 세력을 넓히자 유럽 최대 권력자인 교황이 기사들에게 당시 무역 교역 중심지인 예루살렘에 침략해서 얻는 땅도 개인소유로 할 수 있게 하고, 이전 죄를 사해주는 면죄부를 주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기사들이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가는 길목에서 숙박하고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이를 제공해주 집단이 템플 기사단이었어요. 각 지역에 성당에서 템플 기사단이 동네은행 역할을 한 셈이죠. 기사단들은 예루살렘이 쳐들어가 땅문서를 얻게 되면 그것을 템플기사단 유럽지구에 가서 식/숙박, 무기지급, 통행증 등으로 받게 되는데요.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당시 기사들은 싸워서 이기는 것이 중요했지, 땅은 그저 이겨서 받게 되는 부속물로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기사들이 죽게 되면 나중에 템플 기사단이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 없어지고, 또한 기독교 율법상 이자는 받을 수 없으니 대출상환금을 받을 수 없게 만들어 벌칙금을 부과하는 방식을 만들게 됩니다. 예를 들어, 기사단이 대출을 받아 숙박증이나 여러 들을 템플 기사단으로부터 받으면 2달안에 갚아야 하는 식이고, 이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벌칙금이 불어나는 식이죠, 화폐에 시간개념이 도입된 것 입니다


하지만, 기사단이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는 것만해도 3달이 걸리기 때문에 그 벌칙금은 불어나게 됐고 기사단이 빚이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기사단은 나중에 자신들의 명예를 버리고 돈이 있어보이는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예루살렘에 있는 유태인 이슬람인들을 모두 죽이고 돈이 되는 모든 것들을 약탈하는 사태까지 이르게 되었죠.


왕의 입장에서는 이런 템플 기사단의 행보가 탐탁치 않았지만, 템플 기사단의 세가 쎄기 때문에 직접적인 제압은 힘들었어요. 그래서 프랑스 황제 필립 4세는 1307 10 13일 유럽전역에 비밀 결사대를 조직하여 기사단을 체포하고 악으로 몰아 모두 처형했답니다


하지만, 필립 4세는 이러한 고금리 정책을 폐지 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또 악용하게 되었는데요. 기독교 율법 (신명기)에서는 형제(같은 국가)에게는 이자를 받으면 안되지만, 다른 형제 (다른나라) 에게는 받아도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점을 이용하게됩니다


그래서 필립 4세는 프랑스에 있던 유태인들에게 정상적인 일을 못하게 일자리를 규제하고, 프랑스 국가에서 보증을 서줄 테니 고리대급업을 하라고 하명하게됩니다. 이 때부터 유대인과 프랑스 왕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됩니다. 필립 4세 왕이 유태인들에게 프랑스 기사 또는 국민들의 보증을 서주게 되고, 기사들은 이자를 갚기 위해 여러 땅을 정복해 나가는 식으로 왕은 자신의 권한을 넓힐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당시 유태인들이 유럽인들에게 돈을 대출해주기도 했었는데요. 기사들이 나가서 죽게 되면 역시 이자를 못 갚게 되는데 이때 유태인들이 프랑스 국왕에게 대출이자를 갚으라고 하게 됩니다. 프랑스 국왕은 민중들에게 유태인들 때문에 삶이 피폐해지고 있다는 소문을 일으키게 하고 민중들이 봉기를 일으키게 만들면서 이러한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게 됩니다.


기사들이 이자를 갚게 하기 위한 또 하나의 방책은 왕이 기사들에게 점령할 땅들을 소개시켜 주는 것인데, 이것이 포루투갈이 대항의 시대의 포문을 열게 만드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대항의 시대와 제국주의는 빚을 갚기 위한 기사들의 처절한 움직임이었던 것이죠.






<6. 제국주의의 팽창; 은>


나라의 빚을 청산하기 위해 제국시대의 유럽열강들은 돈이 되는 모든 것들, 필수품, 사치품을 약탈 및 수입하려고 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보화)입니다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를 설립해 증권거래소와 채권거래소를 만들어 금융시장에 자율적으로 맡기게 됩니다. 그래서 중산층들이 주식이나 채권을 사들이면 그 돈이 동인도회사에 중재에 따라 함대로 가게되고, 함대는 다른 나라를 쳐들어가 물건을 약탈해 현물시장으로 넘기게 됩니다


이 현물시장에서 다시 동인도회사로 현금을 넘겨주게 되고, 다시 금융시장에 넘겨 줌으로써 다시 중산층에게 이익을 주는 방식이었죠. 당시 약탈한 물건중에서 가장 인기있었던 것이 후추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후추가 가장 큰 돈이되는 물건이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네덜란드가 후추가 많이 생산되는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삼게 됩니다


그런데 역시 이 시스템에서 또한 이자율 문제를 안고 있었어요. 당시 이자율의 최대치는 40%였는데요. 이 말은 자신이 100% 수익을 내지 못하면 파산한다는 뜻인데,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이러한 이자율을 감당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노예와 마약을 불법적으로 거래하면서 수익을 높이게 되는데, 그래서 아프리카들을 정복하고 사람들을 노예로 삼기시작합니다


그리고 영국은 마약을 국가수출품으로 만들어 수출하기 시작하게되고, 이것이 아편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죠.  






지금까지 화폐의 기원에 대해서 알아보았어요. 이러한 지식을 통해 아편전쟁이 일어난 배경에 대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다음글에서는 아편전쟁과 그 결과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할께요!





[래퍼런스]

 어쩌다 어른, 조승연 작가편, 화폐의 기원

안녕하세요! 시간여행자에요~




첫 영상에서 알 수 있듯이 홍콩과 중국은 단지 민주주의 때문에 서로 다투고 있는건 아니에요. 광둥어라는 것은 홍콩의 뿌리가 되는 언어인데 왜 이것이 북경에서 쓰이는 중국어와 다른걸까요?

이번에는 '광둥어'라는 언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살펴보면서 홍콩이라는 지역의 기원이 되는 배경에 대해서 살펴볼께요~!



<1.한족과 명나라>

대만편에서 살펴봤듯이 한족이 세원 명나라(1368~1644)가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1644~1924)에게 밀려 한족 출신들은 점점 남쪽지방으로 후퇴했어요. 대부분 한족은 푸젠성과 광둥성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사진1>



한족출신 명나라 사람들은 광둥성 지방에서 자신들만의 문화를 구축하면서 살아갔는데요. 광둥어가 그 중 하나라고 합니다~


어쩌면 홍콩시민들은 광둥어야 말로 한족의 순수성을 더 잘 보존하고 있는 언어라고 보는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됐어요. 물론 중국본토에 있는 중국시민들 또한 자신들이 조상을 한족의 뿌리로 두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홍콩시민들이 광둥어를 지키려고 하는 이유는 자신들이야말로 한족의 민족성을 잘 지키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게 됐어요.


당시 여행했을때 홍콩학생들이 사진을 찍자고해서 같이 찍었어요ㅎㅎ

이 학생들은 광둥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이번 글은 굉장히 짧았어요~ 하지만 다음 글부터는 본격적으로 영국과 홍콩의 관계를 다루는 내용이 기재될테니 많이 지켜봐주세요!


 


[사진 레퍼런스]

사진1

https://sites.google.com/site/chinese2011km/jung-gugjibang/gwangdong-gwangseo




안녕하세요~ 시간여행자에요!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 홍콩시위에 관한 뉴스들이 굉장히 많이 나오고 있어요. 왜 중국정부는 홍콩시위를 진압하려고 하는걸까요? 홍콩시민들은 왜 시위를 하고 있는걸까요?


명확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답은 '민주주의'가 아닐까해요. 홍콩시민들은 중국의 공산주의가 들어오는걸 막고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지키려고 하고 있는 중인데요.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요? 홍콩은 중국에서 관할하고 있는 지역인데 어떻게 민주주의가 꽃피게 된걸까요?


오로지 영국의 영향 때문이었을까요?


이러한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 홍콩이라는 지역이 갖고 있는 역사와 '쑨원'이라는 인물의 발자취를 따라가 볼 거에요!


그럼 홍콩의 과거로 여행을 시작하겠습니다!!






Q1. 왜 홍콩에서는 대다수 중국인들이 이해못하는 광둥어를 사용하죠? 

Q2. 영국은 왜 청나라에 아편을 판매한건가요?

Q3. 아편전쟁은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켰나요?

Q4. 홍차가 미국을 탄생시켰다구요?

Q4. 영국은 홍콩을 어떻게 지배하기 시작했나요?

- 홍콩섬

Q6. 쑨원이 누구인가요?

Q7. 홍콩의 과거와 현재는 어떤가요?


홍콩은 마카오와 함께 '해외여행' 카테고리 두 번째 방문지에요! 


위와같은 질문들을 해결해가면서 홍콩이슈들을 좀 더 깊은 관점에서 이해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요! 그럼 출발해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번글에서는 지금까지 배워온 내용을 총 요약해보려고합니다. 


근래 딥러닝 모델이라고 하면 Deep Neural Network (DNN or Multi-Layer Perceptron(MLP)라고 하는 인공신경망(Artificial Neural Network; ANN)을 일컫는데요. 다음장부터는 수식이 조금 더 디테일하고 복잡하게 다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번장에서 중간점검차 요약을 한 번 할까해요.


그럼 이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번장에서는 말투를 좀 편하게 할께요 ㅎㅎ;;)



[1. Supervised Learning]


- 딥러닝(Deep Neural Network) 모델 학습방식  --> Supervised Learning VS Unsupervised Learning

- Supervised Learning: DNN 모델이 예측하는 값과 실제 정답지 (학습데이터)를 통해 DNN 모델을 학습시킴

- Unsupervised Learning: 정답지 없이 데이터의 패턴을 분석해서 데이터의 특징이나 구조를 발견

- 이번글에서는 Supervised Learning을 목적으로하는 DNN 모델들에 대해 설명할 예정




<사진1>


[2. Deep Neural Network]


<1.기본구조>


- DNN은 기본적을로 아래와 같은 구조를 갖음.

- x=Training data --> 'Training data' X '신경망 가중치(weight; w)' = Wx--> activation function (아래그림에서 z=f(U)에서 f가 activation function)) -> 신경망예측값(=z) --> Error = 신경망예측값(=z) - 정답지 --> Backpropagation을 통해 가중치 업데이트

- 결국 DNN은 최상의 분류성능을 내기위한 최적의 '가중치값'을 갖으려는 것이 목적


          


<사진2>                                                  <사진3>










<2. Cost(Error) function>


- Supervised Learning에서 "(Calculate) Error = Training data(정답지) - DNN모델 예측값"이라고 규정함

- 이때 Error를 도출하는 함수식(function)을 cost function이라고 함

- 그런데 Supervised Learning에서도 여러 문제들이 있음, 문제유형에 따라 Error값을 도출하는 방식이 달라짐 --> 즉, cost function 식이 조금씩 다름


<사진4>





- 위의 수식을 가정하고 설명하면


1) Regression(회귀) 문제의 Cost function

- Mean Square Error (MSE) 개념 이용

- 분모 1/2은 backpropagation때 미분계산하려고 할때 편하기 계산하려고 붙임




2) Binary Classification (이진분류) 문제의 Cost function

- Maximum Likelihood Estimation(MSE; 최대우도법) 개념 이용


3) Multi-Class Classification (다분류) 문제의 Cost function

-Cross Entropy 개념 이용









<4. Backpropagation (가중치 학습방법)>


- 제가 블로그에서 식의 유도과정을 전부 기술해놓은 글이 있는데, 대부분 내용이 '딥러닝 제대로 시작하기'에 있는 내용이라 비공개로 설정했어요. 그래서 여기에서는 제가 직접 계산한 과정을 수기로 쓴 파일을 올려놓을테니 한번 보시면 좋을거에요. 이곳에서는 간단한 설명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 Backpropagation은 DNN에서 가중치를 학습(업데이트)시키는 알고리즘 with Chain 

- 보통은 아래와 같이 업데이트 방식이 진행


<사진5>


- 아래파일은 실제로 업데이트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계산한것을 수기로 작성한 파일


6. Backpropagation (2).pdf


아래영상은 Backpropagation이 학습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영상이에요. 참고하세요!












<5.Activation function>


- 활성함수를 쓰는 목적은 DNN 모델이 비선형성을 표현할 수 있게 도와줌

- Layer를 더 쌓을 수록 비선형성을 더욱 잘 표현해줄 수 있는데, activation function까지 같이 활용해주면 더욱 비선형 모델을 잘 표현해줄 수 있음


<사진6. 왼쪽: Target function, 오른쪽 Activation function>



    

<사진7. activation function을 통해 non-linearity를 표현한 경우>



- Activation function 종류에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음


<사진8>


- 변천과정은 아래와 같음


뉴런은 다음 뉴런에게 신호를 보내던지 안보내던지 둘 중에 하나야 --> Step(Binary step) function을 쓰자 --> Backpropagation으로 학습시키려고 하는데 미분이 안돼 --> sigmoid(Logistic) function으로 바꿔 그럼 --> Backpropagation은 기본적으로 미분으로 학습하는데 sigmoid function에는 기울기가 굉장히 낮은 곳들이 있어서 Chain rule을 관점에서 입력층에 가까운 가중치들은 학습이 거의 안됨 (Vanishing Gradient) --> 그럼 기울기 잘되게 ReLU로 바꿔 --> 근데 음수부분은 어떻게 함??? 그쪽은 미분값이 0인데? --> 그럼 Leaky ReLU로 학습시켜봐 --> 아 그런데 뭔가 새로운 방법은 없을까? --> activation function은 계속해서 연구중이야, 아래표 보면 cifar10 성능에서 maxout이라는 activation function이 제일 좋다고 나오지? 앞으로 다른 activation function들이 계속해서 나올거야 아마 --> 그런데 보통 ReLU까지를 기본적으로 배우더라고 그외 것들은 알아서 공부하면 돼!

(참고로 maxout관련 설명은 아래사이트를 참고해!)

http://blog.naver.com/laonple/220836305907


<사진9>









<6. Regularization>


- DNN을 학습시키는 목적이 분류라고 가정 (학습시키는 목적은 Cost function을 어떻게 해주느냐에 따라 회귀문제, 다클래스문제 등 다양함)

- 보통 학습데이터로 학습을 시키고, 다른데이터로 테스트했을 때 역시 성능이 좋아야함

- 그런데, 지나치게 학습데이터를 학습하면 Overfitting이 일어나서 일반화성능이 떨어짐. (그 이유는 학습데이터에도 종종 noise가 있는 안좋은 데이터가 있을 수 도 있고, 학습데이터에 불필요한 특징들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



<사진10>


- DNN은 Overfitting과의 싸움이라고 할 정도로, Overfitting을 방지하기 위한 여러가지 방법이 있음 그 중에 하나가 Regularization


1) Regularization의 철학

- 낮은 가중치 값들은 어차피 있거나 없거나 DNN 성능에 중요한 요소는 아님. 

- 높은 가중치 값들이 DNN 성능에 큰 영향을 미침

- 학습데이터에 지나치게 학습시켰을 때, DNN 가중치는 학습데이터에 최적화. 이렇게 되면 일반화성능 떨어짐

- 그래서 학습시 높은 가중치들에게 Penality를 부여 <-- 이것에 Regularization의 핵심 포인트

<사진11>


2) Regularizaton 종류


- L1 norm을 사용했는지, L2 norm을 사용했는지에 따라 종류가 달라짐

- L1-regularization은 L2-regularization 보다 낮은 가중치 값을 0으로 만들어줘 입력차원을 줄여주는 경향이 있고, 이것은 입력차원을 낮춰주는 효과가 있음

보통은 weight decay regularization에서는 L2-regularization이 사용되고 있음


L1 Regularization ->   

L2 Regularization -> 



아래 영상은 DNN이 이미지를 학습하는 과정을 visualization한 영상이에요.

지금까지 잘따라오셧다면 아래영상에서 소개되는 DNN 학습(진행)과정이 한눈에 들어오실거에요!


 






지금까지 배웠던 내용들을 간략하게 정리해봤어요. 

아마 1~6장 내용이 딥러닝을 배우는 가장 기초적인 뼈대가 될거에요.


다음장부터서는 Overfitting을 피하는 방법들을 좀 더 소개하고 Neural Network 챕터는 마무리하려고 할까해요.


그럼 다음 글에서 찾아뵐게요!!




[사진 래퍼런스]

사진1

https://www.elfarchive.org/2017/12/backpropagation.html

사진4

https://www.deeplearning-academy.com/p/ai-wiki-machine-learning-vs-deep-learning

사진5

https://www.youtube.com/watch?v=An5z8lR8asY

사진6,7

https://towardsdatascience.com/can-neural-networks-really-learn-any-function-65e106617fc6

사진8

https://en.wikipedia.org/wiki/Activation_function

사진9

https://coolingoff.tistory.com/category/%5B%EB%A8%B8%EC%8B%A0%EB%9F%AC%EB%8B%9D%5D?page=2

<사진10>

https://ko.wikipedia.org/wiki/%EA%B3%BC%EC%A0%81%ED%95%A9

<사진11>

https://slidesplayer.org/slide/12402488/



안녕하세요! 시간여행자에요~


이전 글에는 포르투갈과 마카오의 관계를 설명했었죠?


이번 글 역시 포르투갈과 관련있는 글이에요. 하지만, 이번 글에서는 성당에 대한 자세한 설명들과 함께 더욱 재미있는 글을 써보려고해요~



이번글에서는 포르투갈을 가시면 꼭 방문하시게되는 세계문화유산인 '성 바울 성당', 한국인이면 한 번쯤 방문해봐도 좋은 '성 안토니오 성당'에 대해서 설명해보도록 할께요!



<1. 성 바울 성당>


마카오를 방문하면 카지노보다도 먼저 찾는 곳이 있어요. 바로 성 바울 성당이에요! 유럽역사를 알고 계시다면 유럽에서는 로마 카톨릭의 세력이 굉장했던걸 아실거에요. 그래서 포르투갈인들이 마카오로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종교인 카톨릭을 마카오에 정착시키게 됐죠.


성 바울 성당은 1580년 선교사를 양성해 아시아 주변 국가에 파견할 목적으로 건립되었어요. 당시 마카오가 해상 무역으로 번성하여 성당을 크게 지을 수 있었다고 하네요.


그런데 1595년, 1601년, 1834년 화재로 훼손된적이 있었답니다. 앞선 두 번의 화재를 겪었을 때에는 모두 목재로 지은 건축물이었는데, 두 번의 화재를 겪었을 때 앞부분을 목재가 아닌 화강암으로 짓게 되었다고 해요. 그런데 세 번째 화재가 나서 뒷 부분의 목재는 전부 타버렸다고 합니다. 이후 화재가 나서 없어진 뒷 부분은 복원하지 않았는데요. 들리는바에 의하면 이것이 신의 뜻이라고 하여 더 이상 복원하지 않는다는 설도 있었어요.


아래의 사진이 성당의 뒷 부분이에요. 뒷 부분이 화재로 모두 타버려서 그냥 성당의 앞부분인 정문만 외로이 남겨져 있네요. 여기에는 종교 예술 박물관이 있고 따로 안으로 들어가면 성당터에서 발굴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으니 꼭 구경해보시길 바래요!




아래 사진은 성 바울 성당의 정문이에요. 그런데 성바울 성당의 정문에 있는 조형물들은 각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해요. 각각의 의미를 알기전에 카톨릭교의 기본적인 지식을 알려드릴께요.


카톨릭 신학에서는 삼위일체라는 중요한 교리가 있어요하느님은 본질에서 한분이시며 인격(페르소나)에서는 3(성부성자성령)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이에요.

①성부구원을 계획하시는 분.

②성자구원에 필요한 일을 완수하시는 분 (성자의 육체적 현현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③성령성자가 완수한 구원의 은총을 구원 받을 사람에게 적용하시는 분. (특히 가톨릭교회에서는 이 성령을 매우 중시)




성 바울 성당의 조형물이 지니는 의미

1)첫 번째 단

- 비둘기: 성령의 힘

- 비둘기 주변에 있는 해, 달, 별: 천지창조

2)두 번째 단

- 비둘기 아래에 있는 예수상 왼쪽의 채찍, 가시관: 고난

- 비둘기 아래에 있는 예수상 오른쪽의 계단: 천국으로 가는 계단

3)세 번째 단(예수회의 종교관)

- 성모마리아 상 좌우측(주변)으로 6명의 천사

- 성모마리아 상 맨 왼쪽에서 오른쪽방향으로 펼쳐진 그림의 의미: 사탄으로 인해 인간은 망망대해를 떠돌아 다니는 존재이나 구원의 샘물로 생명의 나무를 얻는다. 만약 구원을 받지 못하면 용에 의해 해골(지옥)이 된다.



양쪽에 튀어나온 중국풍 사자는 유럽 성당에서는 볼 수 없는 장식이에요해골 왼쪽에 사후를 생각해 죄를 짓지 말라 의미의 중국어가 적혀 있어요.






(참고로 성 바울 성당에는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있어요. 인생샷을 찍으시려면 새벽에 가야..ㅜㅜ)


성 바울 성당을 뒤로하면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을 그대로 옮긴 듯한 '세나도 광장'이 보여요. 아래 사진의 동상은 평화의 의미를 상징하는데요. 그 이유는 포르투갈이 마카오를 식민지배 한 이후부터 중국에 반환할 때까지 피를 흘린적이 없어라고해요. 남자동상은 포르투갈인 여자는 중국인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2.성 안토니오 성당>


어쩌면 성 안토니오 성당은 한국인들에게 성 바울 성당보다 더 특별한 곳일 수 있어요. 왜냐하면 이곳은 한국인 최초로 카톨릭 사제였던 김대건 신부의 흔적이 있기 때문이에요.


 


또 다른 성당인 성 안토니오 성당은 마카오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면서 한국인 최초로 카톨릭 사제였던 김대건 신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 인연으로 매주 토요일 오후 4시에는 한국어 미사가 열리기도 한다


1821 충청남도 당진 출생 -> 가족이 대대로 카톨릭집안 -> 당시 조선에서 지속적인 박해를 받음 -> 1836년 몇몇 평신도들과 조선을 떠나 1837년 마카오에 도착 -> 마카오는 포르투갈 식민지역이었기 때문에 조선(or 명나라)의 위협에서 안전 -> 1839년 기해박해로 아버지가 순교


(김대건 신부의 흔적은 마카오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의 근거지인 상해에서도 찾을 수 있었어요. 이 부분은 '상하이'편에서 다루도록 할께요~)


바로 이곳이 성 안드레아 성당이에요!






성당 내부 오른쪽편에는 김대건 신부님 동상이 있어요~ 성 안드레아 성당은 김대건 신부의 동상뿐아니라 토요일 오후4시에 한국어 미사를 진행하기도 한답니다!




이곳에서 소액을 지불하면 아래와 같이 글을 쓰고 전시할 수 있게 해주어서, 소원을 적어봤어요~




마카오에는 굉장히 화려하기만 할 줄 알았는데, 사실 마카오는 본래 굉장히 조용한 곳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시간이었어요. 


아마 카지노와 같은 화장을 진하게 칠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화장에 가려진 얼굴이 더 아름다운 곳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글 래퍼런스]

http://www.ttearth.com/world/asia/china/macau/ruins_of_st_pauls.htm#.XhNKakczY2w

https://namu.moe/w/%EA%B9%80%EB%8C%80%EA%B1%B4%20%EC%95%88%EB%93%9C%EB%A0%88%EC%95%84


안녕하세요! 시간여행자에요~


이번에는 마카오의 기원이 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다루어보도록 할께요!


과학기술의 발전은 유럽의 대항로개척의 시대를 열었어요.


<사진1>



1553년 포르투갈인들이 마카오에 하게 되었는데, 이때 당시에는 명나라 관할에 있었던 곳이었어요. 이전 대만여행글에서 대만이 원주민에 나라였다고 했던거 기억하시나요? 당시 대만이라는 지역은 명나라나 청나라에게 그렇게 중요한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관리가 허술했던 모양이에요.


포르투갈인들은 1557년에 명나라 관리자들에게 뇌물을 주고 마카오 거주권을 획득하게 되었고, 광둥의 중국 관리로부터 도시건설허가를 얻었다고해요. 


포르투갈이 그곳에 터를 잡고 살려고 했다면 그곳의 지명을 알아야겠죠? 물론 당시 그 지역의 중국명칭이 있었겠지만, 포르투갈 사람들은 지나가는 현지인들에게 이곳이 어디냐고 물어본 후 그들이 아마가오(A-ma-gao))사원을 가리켰다고해요ㅎㅎ



그래서 '아마가오'->'마카오(마가오)'라는 명칭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마사원은 마카오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고뱃사람을 지켜 주는 수호신 아마(틴하오)를 모신고 있어요



향을 피우기 위해서는 구매(제일큰거 20$)를 해야 하는데 항상 3개씩 묶음으로 판매한다고 합니다. (향을 피우는데 꽤 시간이 걸린다고해요;)




당시 제가 방문했을 때 어느 방송매체에서 왔었나봐요. 역시 그 지역의 공식적인 방문을 하는 경우에는 그 지역의 역사가 메인포인트가 되는구나라는걸 느끼는 순간이었어요~



아마사원을 마주하고 왼쪽편을 보게되면 독특하게생긴 건물을 볼 수 있어요. "Capitani dos portos"라는 문구가 있는데, 이 문구는 항무부라는 뜻도 있지만 포르투갈의 식민지 행정구를 의미한다고해요. 당시 포르투갈인들이 아마사원을 특별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바로 옆에 정부기관 건물을 세웠던것 같아요. 


   


마카오는 1841년 영국이 홍콩에 식민지를 개설하기까지 중국과 서양의 유일한 교류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마카오를 거쳐 중국으로 전해진 문물은 그리스도교 외에 서양에서 발달한 천문학유클리드 기하학근대적인 지도투영법대포주조기술 등이 있었다고 하네요.


영국이 본격적으로 동아시아에 세력을 펼치는 시기에 포르투갈 또한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1887년 청나라와 조약을 맺어 마카오 식민지 건설을 합법화했다고 합니다. 1951년 포르투갈의 헌법개정에 따라 마카오를 식민지 구역이 아닌 자신들의 정식 영토로 인정해 버립니다.


하지만, 1966년 중국의 문화대혁명 사건으로 인해 마카오의 포르투갈 관료들과 현지 중국인 간에 분쟁이 일어난 사건을 시작으로 지속적은 마찰을 맺은 끝에, 1973년 마카오를 '자치령'의 개념으로 관리했다고 합니다.


결국에는 1979년 중국과의 수교를 통해 1986년 베이징에서 마카오 반환협정을 체결하고, 1999.12.20 중국은 마카오에 대한 주권을 회복하게 됩니다.




이번 마카오 여행을 하면서 느낀것이 마카오라는 지역은 사실 19세기 포르투갈의 모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듯한 느낌이었어요. 에그타르트가 유명한것만 봐서도 포르투갈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있는 것 같더라구요 ㅎㅎ (에그타르는 18세기 포르투갈 수녀원에서 탄생한 음식이라고하네요!ㅎㅎ)


그리고 돌아다니시면 종종 포르투갈어도 많이 보실 수 있으실거에요 ㅎㅎ


아마사원은 많은 관광객들이 들리는 곳은 아니지만 마카오라는 곳의 기원이 되는 곳을 방문하고 싶다면 꼭 강추할께요!!! ㅎㅎㅎ


그럼 다음글에서 뵐께요~!



[글 래퍼런스]


안녕하세요~ 시간여행자입니다!


마카오는 홍콩에서 페리를 타면 1시간이내에 도착하기 때문에 보통 홍콩을 가시는 분들은 마카오까지 들리는 경우가 많아요~


특히 마카오에는 '하우스 오브 댄싱'이나 수 많은 '카지노'들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죠! 물론 육포와 에그타르트 맛도 예술인 곳이에요ㅎㅎ


그런데 그거 아시나요? 마카오는 성당이 굉장히 많아요. 이상하죠? 분명히 중국관하에 있는데 어떻게 성당이 많을 수 가 있었던건지;


그 외에도 마카오 또한 한국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에요. 특히 한국인 크리스천분들이라면 꼭 한 번 방문하길 바래요ㅎㅎ


그럼 재미있는 역사를 갖고 있는 마카오로 시간여행을 떠나보겠습니다!!





Q1. 마카오에는 왜 이렇게 포르투갈의 흔적들이 많을까?

-마카오 지명 어원

-에그타르트

Q2. 마카오에는 왜 이렇게 성당이 많은걸까?

- 마카오에 있는 성당 중에서 매주 토요일 오후4시에 한국어 미사를 여는 곳이 있다?

- 교황자오선이 마카오에?



자 그럼 이번에도 위와 같은 순서대로 과거여행 떠나보도록 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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