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시간여행자에요!


이번에는 영국이 청나라에게 아편을 판매하면서 어떤 사건들이 일어났는지 알아보도록 할거에요!






<1. 영국의 동인도회사 설립>


유럽열강들과 경쟁하던 영국은 인도에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게 됩니다. 광동 성 광저우에 무역항을 설치한 후 무역을 해나가긴 했지만, 1793년 청나라 황제 건륭제는 영국에게 원하면 문호는 열어주는데 너희 물건을 필요하지 않다고 이야기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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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이야기 했던 이유는 당시 영국이 중국에 수출하려고 했던 품목은 면화시계보석모직물 등이고영국이 중국으로부터 수입하려고 했던 것은 도자기비단은이었기 때문인데요그런데 당시 중국 중하류층들이 입고 있던 의복이 면화베였으며 상류충의 의복이 비단이었기 때문에 영국의 수출품이 매력이 없던 것이었죠. 반대로 차비단은 영국인들에게는 필수품이었지만요당시 광둥 13행의 주요 상점들 은행(은을 거래), 차행(차를 거래), 도행(도자기를 거래), 약행(약을 거래이 있었다고 합니다.







<2. 청나라에게 아편판매>


이전글에서 설명했듯이 당시 영국은 '은'을 모으는데 혈안이었지만 중국과의 교역에서 오히려 은이 유출되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중세 유럽에서는 실크로드(비단길: 중국에서 중앙아시아, 인도로 이어지는 교역로를 통해 거래되던 교역품이 주로 비단이었던 것에서 유래) 를 통해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를 비롯한 갖가지 수입 명품을 사기 위해 금과 은을 지불하면서 금속화폐를 탕진했기 때문이죠. 그 중에서 특히 은의 유출이 컸는데, 그 이유는 은이 유럽에서보다 중국에서 상대적으로 고평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전글인에서 설명드렸듯이 은이 부족한 유럽인들은 노예와 마약을 불법적으로 거래하면서 수익을 높이게 됩니다. 그래서 아프리카들을 정복하고 사람들을 노예로 삼기시작했다. 그리고 영국은 마약을 국가수출품으로 만들어 수출하기 시작합니다


인도의 동인도회사에서 인도산 양귀비를 싱가포르에서 제조해서 부패한 청나라 관료들의 도움을 받아 중국에 판매하기 시작하죠. 그외에 당시 영국에 대한 중국의 최대수출품은 차()였고 (왜 차가 최대 수출품이었는지는 다음장에서 설명할께요!), 영국의 주요수출품은 모직물과 인도산 면화였습니다


양국의 무역수지는 중국의 수출초과 상태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영국으로서는 차 수입을 결제할 은()이 부족하게 되었죠. , 차를 구입하는데 은을 모두 써버려서 국가에 경제에 큰 타격을 입게 된 것입니다. 이에 따라 영국은 중국에 아편을 수출해 무역적자를 해소하려 했습니다







<3.아편전쟁의 시작과 난진조약>


당시 청나라에서는 담배도 금지가 되었고, 빈부격차도 극도로 심했기 때문에 사회가 절망하게 되자 도박과 마약이 흥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영국인들이 청나라인들에게 아편을 판매하기 시작했죠. 하지만 나중에 문제가 되자 청나라 황실에서는 임칙서를 보내 아편거래를 못하게 만들었죠. 당시 임칙서는 영국에서 온 마약을 몰수해 바다에 투척했습니다.


<사진2>



 이러한 일을 겪은 영국은 1차 아편전쟁 (1840)을 일으키고 압도적인 군사 기술력으로 청나라를 몰살시키게 됩니다. 이 전쟁은 1842년에 영국의 승리로 끝났고, 난징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난징조약으로 영국은 홍콩섬을 할양받고,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등 다섯 개 항구를 강제적으로 개항시키게 됩니다.



난징조약 - 난징 조약(南京條約, 1842 8 29) 1840년부터 1842년까지, 2년간 벌어진 제1차 아편 전쟁을 끝내기 위해 1842 8 29일 청나라와 영국과의 사이에 맺은 불평등 조약


1.양국은 평화, 친목을 유지하며 상호간 재산·생명의 보호를 받는다.

2.청나라와 영국 두 나라 관리는 대등한 자격으로 교섭을 한다.

3.홍콩 섬을 영국에 할양한다.

4.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등 다섯 개 항구를 개항한다.

5.개항장에 영국인 가족의 거주를 허가하고, 영사관을 설치한다. (조계를 허용한다.)

6.전비배상금으로 1,200만 달러와, 몰수당한 아편의 보상금으로 2100만 달러를 영국에 지불한다.

7.행상(行商) , 공행(公行)과 같은 독점상인을 폐지한다. 또한 공행이 영국 상인들에게 진 빚에 대한 보상금으로 300만 달러를 지불한다.

8.수출입 상품에 대한 관세율은 양국이 협의하여 결정한다.




사실 1차 아편전쟁을 통해서는 홍콩섬만 할양받고 현재 홍콩을 이루고 있는 나머지 구역을 할양받지 못한상태였어요.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1차 아편전쟁을 통해 홍콩섬을 할양받은 거에요. 실제로 홍콩은 홍콩섬과 구룡반도, 신계로 구성되어있는데요. 그럼 어떻게 나머지 부분들을 할양받을 수 있었을까요?


   

<사진3>                                                       <사진4>






<4. 2차 아편전쟁(애로호 전쟁)>


앞서 영국이 홍콩섬을 할양받았다고 했죠? 영국은 1차 아편전쟁 후 홍콩을 기점으로 무역을 활발히 펼치려 했지만 청나라는 경제적으로 자급자족 성격이 강했습니다. 또한 중국의 면포는 품질이 우수하여 영국의 주력상품인 모직물과 인도산 면화는 상대가 되지 못했던거죠. (당시 프랑스도 청나라에서 무역성과가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1차 아편전쟁 이후 광둥을 중심으로 영국에 대한 항쟁운동이 전개되었는데요. 1856년 10월 청나라 관원은 해적선으로 보이는 애로호라는 선박을 단속했습니다. 그런데 해당 선박은 중국인 소유의 해적선이었는데, 배에는 영국국기가 달려있었다고해요. 본래 그 배에는 중국인선원 13명과 영국인 선장 1명이 있었는데 체포시에는 영국인 선장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체포과정에서 청나라 관료가 영국국기를 불태워 바다에 던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영국은 이에 대해 국가모독의 죄명을 씌워 배상금과 사과문을 내라고 하였으나 당시 청나라는 해당 배는 중국인 소유고 해적선 자체가 불법이니 배상과 사과를 할 필요가 없다며 강하게 일축했어요. 이를 빌미로 영국과 프랑스는 연합군을 형성하고 1857년 12월 광저우를 점령하고 청나라 관료를 포로로 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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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양측이 대립하는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본격적인 2차 아편전쟁을 벌여 영국, 프랑스 연합이 승리하게 됩니다. 그 결과 1858년 톈진조약을 맺게됩니다. 


1. 전쟁에 대한 배상금

2. 외교관을 베이징에 주재하게 할 것

3. 외국인의 중국 여행과 무역의 자유 보장

4. 기독교 포교의 자유와 선교사 보호

5. 뉴장(만저우), 덩저우(산둥반도), 한커우(장강 연안), 주장(장강 연안), 전장(장강 연안), 타이난(타이완), 단수이(타이완), 차오저우(광둥성 동부, 이후 샨토로 변경), 치웅저우(하이난 섬), 장닝(장강 연안) 등 10개의 항구를 개방할 것








<3. 1차 베이징 조약 & 2차 베이징 조약>


1) 1차 베이징 조약

청나라 조정에서는 톈진조약이 불평등 조약이라고 주장하면서 영프 연합군을 다시 방해하게됩니다. 그러자 영프 연합군은 다시 베이징까지 밀고 올라가 베이징까지 점령하게 됩니다. 이때 1859년 베이징 조약을 맺게 되는데, 베이징 조약을 통해 구룡반도(Kowloon)를 할양받게 됩니다.


 

<사진6>



2) 2차 베이징 조약

청일전쟁 이후 영국이 홍콩 방위 목적으로 중국과 교섭을 벌이게 됩니다. 이때 2차 베이징 조약(1898)을 맺고 홍콩의 나머지 부분인 신계(The New Territories)를 할양을 받게 됩니다.



이로써 영국에 의한 홍콩 지배는 1842~1997년까지 진행되게 됩니다. 




다음글에서는 잠시 홍차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할꺼에요! 재미있는 스토리가 있으니 기대해주세요!






[사진 래퍼런스]

사진1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a/print.do?levelId=ta_h62_0030_0010_0010&whereStr=

사진2

http://study.zum.com/book/12725

사진3

https://en.wikipedia.org/wiki/Hong_Kong

사진4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alname32&logNo=221638298615

사진5

http://m.blog.daum.net/guidesyj/289

사진6

https://namu.moe/w/%ED%99%8D%EC%BD%A9/%EA%B4%80%EA%B4%91



[글 래퍼런스]

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C%98%81_%EC%A0%9C%EA%B5%AD

http://news.mk.co.kr/newsRead.php?no=988681&year=2014

https://brunch.co.kr/@rlfrjsdn/26

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D%8E%B8_%EC%A0%84%EC%9F%81

https://ko.wikipedia.org/wiki/%EB%82%9C%EC%A7%95_%EC%A1%B0%EC%95%BD


안녕하세요! 시간여행자에요~


영국이 홍콩을 지배하게 된 이유는 아편전쟁 때문이에요. 그런데, 이 아편전쟁은 왜 일어난 것 일까요?

그 이유를 알기위해서는 화폐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번 장에서는 화폐의 역사를 통해 아편전쟁이 일어난 이유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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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래 글들은 대부분 "TVN 어쩌다 어른; 조승연 작가편; 화폐의기원"이라는 곳에서 시청하면 훨씬 이해도 잘되고 생동감 있게 내용을 들으실 수 있으실거에요. 그래서 꼭 한 번 시청하시는 걸 추천드려요!


작가님께서 오마이스쿨과 함께 따로 유튜브에 무료영상을 올린 것 도 있으니 시청하시면 더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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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의 역사]


<1. 최초의 화폐; 인간>


대도시가 생기기 전에는 서로 물물교환이 주가 되었어요. 한쪽에서 돼지가 필요해서 돼지를 빌리면, 돼지를 빌려준 쪽에서 나중에 쌀이 필요하면 쌀을 빌리는 식이었죠. 하지만,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시작되고 대도시가 생기면서 익명성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이는 공동체의 개념이 약화시켰어요. 때문에 옆에 사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 경우도 생기고, 어느덧 이사를 해 사라져 버리는 경우도 생기는 것이었죠.


그래서, 이때부터 점토에 빌려주고 빌린 것들에 대해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점토에 기록하고 들고 다니기가 너무 무거웠기 때문에 나중에는 토큰같은 것을 실로 엮어 팔찌로 만들어 들고 다니면서 자신의 물건을 빌려간 사람에게 보여주게 되었어요


하지만, 이 당시에도 빚을 갚는 형태는 물물교환이었다. 그래서 A B C에게 양10마리를 빌려줬는데, C A에게는 쌀 5포대, B에게는 쌀 7포대 주는일이 생겨 갈등이 벌어지는 일이 생겼다. 그래서, 이러한 불공정 거래를 없애기 위해 도량형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메소포타미아는 소한 마리를 빌리면 소 한 마리를 빌렸다고 하지말고 은 50g을 빌렸다고 기록하라고 명명하면서 가치에 대한 평가를 무게로 통일하게 된 것 이죠


그런데 당시 은 워낙 귀했기 때문에 화폐로 기능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도량형이 발표된 후 빌려준 물건을 갚지 못했을 때에는 갚지 못한 집안의 딸을 납치하거나 가장을 죽였다. , 은이 담보가 아닌 인간이 담보인 사회였던 셈이죠 (인간화폐의 시대 도래).






<2. 최초의 이자개념; 노예제도>


인간화폐가 나중에 노예제도로 발전하게 되는데, 그것에 크게 기여한 것이 지구라트라는 곳이에요지구라트라는 곳은 흉년에 대비하기 위해 비상식량을 저축하는 곳이자 신전역할을 하기도 했는데요. 당시 메소포타미아인들은 강 주변에서 살면서 농경사회를 이루었는데, 당시 홍수와 가뭄을 피하기 위해 지구라트에 곡식을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고해요


가뭄이나 홍수가 들어 주민들이 곡식을 재배하지 못할 때면 종자 씨를 구하기 위해 지구라트에가서 빌리고는 했는데, 지구라트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종자 씨 하나를 주면 다섯 알갱이가 나오니, 나중에 갚을 때 두 알갱이로 갚어라라는 이자 개념을 도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보통 흉년과 풍년이 번갈아 일어나지 않고 흉년이 연달아 일어나는데, 이런 경우에는 주민들이 이자만 늘어나는 사태가 발행하고 빚이라는 것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노예가 되기 시작하게 되었는데요. 이것을 통해 노예 사회 (1% 지배계층, 99% 노예) 가 시작되기 시작하게 됩니다. 당시에도 여성은 여전히 아버지의 소유재산으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빚이 많아져서 파산을 하게 되면 그 집안 여성들을 데려와 윤락업소에 판매를 하게 됩니다





<3. 군사화폐 그리고 세금의 시작; 은> 


노예 화폐시대에는 굉장히 긴 주기를 가지고 노예들이 한 번씩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노예가 화폐인 사회는 크게 한 번씩 기반이 흔들리곤 했어요. 그래서 왕들은 시민계급을 대규모 군대조직으로 만들어 반란을 일으키는 노예들을 죽였습니다


이러한 반란을 막는 또 하나의 방법은 노예를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었어요. 알렉산더 대왕은 이때부터 은을 화폐로 만들어 시민계급에게 뿌림으로써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해주면서 군대조직을 더 강화시켰어요. 당시 '은'이 귀했기 때문에 이때부터 다른 나라의 신전을 공격하는 정복전쟁(이집트, 페르시아 등)을 일으킵니다 (보통 신전에 많이 '은'이 있었다고해요). 알렉산더 대왕은 이 때부터 정복전쟁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티레, 이집트, 페르시아 등). 


약탈한 금은 보화는 녹여 동전으로 발행하기 되는데 이것이 최초의 금속 화폐에요. 당시 군사들은 소금(salt) or 은화를 봉금(salary)로 받았다 (소금은 생필품이었음으로 시장가치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은화가 온전히 화폐로 통용되지는 않았다고해요. 예를 들어, 고대 잉카부족에서는 딱딱한 은이 어떤 가치를 지니지 못했기 때문에 은화를 통해 거래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은화를 건내주면 옷, 식량 등을 사입거나 사먹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는데, 지배계층들은 이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 세금이라는 것을 은화로 징수하기 시작해서 모든 마을 부족 사람들이 은화를 사용하겠금 만들었어요. 그래서 모든 마을과 부족들이 군사들에게 생필품이나 무기 등을 팔 수있게 함으로써 모든 마을과 부족들을 보급처로 만들었죠. 이 후로, ‘이 화폐로써 자리잡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노예의 반란을 근본적으로 없애는 해결할 순 없었어요. 왜냐하면 빚이 생기는 이유는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자가 때문이에요. 또한, 농민들이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군대에 들어갔지만 긴 시간의 군대생활과 지속적인 이자로 빚이 늘어나는 이중고 생활을 겪게됩니다. 그래서 결국 군사화폐의 시대는 종결이 되었죠.





<4.어음화폐의 출현; 예수, 무하마드>


군사화폐의 문제는 이자로 인한 사회적 시스템의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이러한 이자를 받으면 안된다고 주장한 사람이 성자로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그 사람이 기독교의 창시자인 예수그리고 이슬람의 창시자인 무함마드’에요


예수는 고리대금 없자들을 내쫓으면서 이러한 스토리가 유럽전역에 퍼지게 됩니다. 그래서 당시 많은 대중들이 예수와 무함마드의 말을 따르고 그들의 행적을 기리기 위한 운동들을 했죠. 이자를 받는 장소인 신전(앞서 언급한 지구르타)을 파괴하고 예수와 무함마드가 한 말들의 일부분을 법제화 (ex: 성경-이자를 없애라) 하도록 주장하고, 종교화하기 시작했어요


은행역할을 하던 신전이 폐쇠되자 유럽은 금융업자들이 돈을 숨기게 되고 통화시스템이 무너지게되어 자급자족 사회인 봉건사회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이슬람은 어음이라는 제도를 통해 화폐제도를 유지하게 되는데요. 당시 어음은 지금 돈을 빌리고 나중에 돈을 갚겠다라는 약속증이었어요


어음을 돌려받을 때 수수료를 천원추가 하게 되는데 (사실 이것이 이자나 다름없지만), 당시 굉장히 괜찮은 아이디어였다고 합니다. 예를들어, A(이슬람) 상인이 B(유럽) 상인에게 어음을 돌려받으려고 할 때, B상인이 C(중국)상인에게 어음증을 내주었으니 C상인에게 어음증을 받고 자신(B(유럽)상인)에게는 그냥 물건을 주면 된다고 하는 식으로 진행되어 결국 이슬라 어음 시스템이 국제적인 화폐 시스템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상인들은 유럽과 중국의 중심점인 말레시아 말라카에 거대한 어음거래소 (유네스코) 를 설치하게 되고, 나중에 말레이시아가 강성해지자 어음거래소를 남쪽으로 조금 내려 쿠알라룸푸(중동 산업과 금융 중심가 됨) 에다 이전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이슬람은 신용거래를 한셈인데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모든 이슬람사람들이 메카에 가서 상인들의 신용에 대해 이야기 하기 때문에 신용을 지킬 수 밖에 없었다고해요. 이렇게 이자도 받지 않고 신용으로 거래하는 상인들이 존경받는 시대가 도래했고 알라바바나 신밧드라는 이름으로 남겨져 있었다고 하네요


하지만, 어음화폐는 개인이 화폐를 발행한 다는 단점이 있기 때문에 대규모 군대 조직이 생기기 어렵고 국방력이 약화 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단점으로 인해 서서히 아랍제국이 몰락하게 되고 어음화폐가 사라지게 됩니다.




<5. 유태인과 제국주의>


아랍에서는 어음화폐제도가 무너졌지만, 유럽인들이 어음화폐제도를 고리대금으로 악용하게 되요. 당시 유럽사회는 봉건제도로써 영주들과 계급제도가 있었는데 (귀족, 기사, 농민), 이슬람 국가들이 세력을 넓히자 유럽 최대 권력자인 교황이 기사들에게 당시 무역 교역 중심지인 예루살렘에 침략해서 얻는 땅도 개인소유로 할 수 있게 하고, 이전 죄를 사해주는 면죄부를 주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기사들이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가는 길목에서 숙박하고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이를 제공해주 집단이 템플 기사단이었어요. 각 지역에 성당에서 템플 기사단이 동네은행 역할을 한 셈이죠. 기사단들은 예루살렘이 쳐들어가 땅문서를 얻게 되면 그것을 템플기사단 유럽지구에 가서 식/숙박, 무기지급, 통행증 등으로 받게 되는데요.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당시 기사들은 싸워서 이기는 것이 중요했지, 땅은 그저 이겨서 받게 되는 부속물로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기사들이 죽게 되면 나중에 템플 기사단이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 없어지고, 또한 기독교 율법상 이자는 받을 수 없으니 대출상환금을 받을 수 없게 만들어 벌칙금을 부과하는 방식을 만들게 됩니다. 예를 들어, 기사단이 대출을 받아 숙박증이나 여러 들을 템플 기사단으로부터 받으면 2달안에 갚아야 하는 식이고, 이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벌칙금이 불어나는 식이죠, 화폐에 시간개념이 도입된 것 입니다


하지만, 기사단이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는 것만해도 3달이 걸리기 때문에 그 벌칙금은 불어나게 됐고 기사단이 빚이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기사단은 나중에 자신들의 명예를 버리고 돈이 있어보이는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예루살렘에 있는 유태인 이슬람인들을 모두 죽이고 돈이 되는 모든 것들을 약탈하는 사태까지 이르게 되었죠.


왕의 입장에서는 이런 템플 기사단의 행보가 탐탁치 않았지만, 템플 기사단의 세가 쎄기 때문에 직접적인 제압은 힘들었어요. 그래서 프랑스 황제 필립 4세는 1307 10 13일 유럽전역에 비밀 결사대를 조직하여 기사단을 체포하고 악으로 몰아 모두 처형했답니다


하지만, 필립 4세는 이러한 고금리 정책을 폐지 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또 악용하게 되었는데요. 기독교 율법 (신명기)에서는 형제(같은 국가)에게는 이자를 받으면 안되지만, 다른 형제 (다른나라) 에게는 받아도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점을 이용하게됩니다


그래서 필립 4세는 프랑스에 있던 유태인들에게 정상적인 일을 못하게 일자리를 규제하고, 프랑스 국가에서 보증을 서줄 테니 고리대급업을 하라고 하명하게됩니다. 이 때부터 유대인과 프랑스 왕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됩니다. 필립 4세 왕이 유태인들에게 프랑스 기사 또는 국민들의 보증을 서주게 되고, 기사들은 이자를 갚기 위해 여러 땅을 정복해 나가는 식으로 왕은 자신의 권한을 넓힐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당시 유태인들이 유럽인들에게 돈을 대출해주기도 했었는데요. 기사들이 나가서 죽게 되면 역시 이자를 못 갚게 되는데 이때 유태인들이 프랑스 국왕에게 대출이자를 갚으라고 하게 됩니다. 프랑스 국왕은 민중들에게 유태인들 때문에 삶이 피폐해지고 있다는 소문을 일으키게 하고 민중들이 봉기를 일으키게 만들면서 이러한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게 됩니다.


기사들이 이자를 갚게 하기 위한 또 하나의 방책은 왕이 기사들에게 점령할 땅들을 소개시켜 주는 것인데, 이것이 포루투갈이 대항의 시대의 포문을 열게 만드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대항의 시대와 제국주의는 빚을 갚기 위한 기사들의 처절한 움직임이었던 것이죠.






<6. 제국주의의 팽창; 은>


나라의 빚을 청산하기 위해 제국시대의 유럽열강들은 돈이 되는 모든 것들, 필수품, 사치품을 약탈 및 수입하려고 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보화)입니다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를 설립해 증권거래소와 채권거래소를 만들어 금융시장에 자율적으로 맡기게 됩니다. 그래서 중산층들이 주식이나 채권을 사들이면 그 돈이 동인도회사에 중재에 따라 함대로 가게되고, 함대는 다른 나라를 쳐들어가 물건을 약탈해 현물시장으로 넘기게 됩니다


이 현물시장에서 다시 동인도회사로 현금을 넘겨주게 되고, 다시 금융시장에 넘겨 줌으로써 다시 중산층에게 이익을 주는 방식이었죠. 당시 약탈한 물건중에서 가장 인기있었던 것이 후추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후추가 가장 큰 돈이되는 물건이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네덜란드가 후추가 많이 생산되는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삼게 됩니다


그런데 역시 이 시스템에서 또한 이자율 문제를 안고 있었어요. 당시 이자율의 최대치는 40%였는데요. 이 말은 자신이 100% 수익을 내지 못하면 파산한다는 뜻인데,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이러한 이자율을 감당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노예와 마약을 불법적으로 거래하면서 수익을 높이게 되는데, 그래서 아프리카들을 정복하고 사람들을 노예로 삼기시작합니다


그리고 영국은 마약을 국가수출품으로 만들어 수출하기 시작하게되고, 이것이 아편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죠.  






지금까지 화폐의 기원에 대해서 알아보았어요. 이러한 지식을 통해 아편전쟁이 일어난 배경에 대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다음글에서는 아편전쟁과 그 결과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할께요!





[래퍼런스]

 어쩌다 어른, 조승연 작가편, 화폐의 기원

안녕하세요! 시간여행자에요~




첫 영상에서 알 수 있듯이 홍콩과 중국은 단지 민주주의 때문에 서로 다투고 있는건 아니에요. 광둥어라는 것은 홍콩의 뿌리가 되는 언어인데 왜 이것이 북경에서 쓰이는 중국어와 다른걸까요?

이번에는 '광둥어'라는 언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살펴보면서 홍콩이라는 지역의 기원이 되는 배경에 대해서 살펴볼께요~!



<1.한족과 명나라>

대만편에서 살펴봤듯이 한족이 세원 명나라(1368~1644)가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1644~1924)에게 밀려 한족 출신들은 점점 남쪽지방으로 후퇴했어요. 대부분 한족은 푸젠성과 광둥성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사진1>



한족출신 명나라 사람들은 광둥성 지방에서 자신들만의 문화를 구축하면서 살아갔는데요. 광둥어가 그 중 하나라고 합니다~


어쩌면 홍콩시민들은 광둥어야 말로 한족의 순수성을 더 잘 보존하고 있는 언어라고 보는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됐어요. 물론 중국본토에 있는 중국시민들 또한 자신들이 조상을 한족의 뿌리로 두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홍콩시민들이 광둥어를 지키려고 하는 이유는 자신들이야말로 한족의 민족성을 잘 지키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게 됐어요.


당시 여행했을때 홍콩학생들이 사진을 찍자고해서 같이 찍었어요ㅎㅎ

이 학생들은 광둥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이번 글은 굉장히 짧았어요~ 하지만 다음 글부터는 본격적으로 영국과 홍콩의 관계를 다루는 내용이 기재될테니 많이 지켜봐주세요!


 


[사진 레퍼런스]

사진1

https://sites.google.com/site/chinese2011km/jung-gugjibang/gwangdong-gwangs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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