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시간여행자에요!



지난글들을 보며 홍콩이 왜 중국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죠? 그렇다면 다시 한 번 홍콩에서 일어난 2번의 시위(2014, 2019)에 대한 인터뷰를 들어 볼게요.






홍콩이 지키고 싶은 것이 '민주주의'일까요? '한족의 정체성'일까요? '과거의 향수'일까요? 


홍콩여행을 하면서 느꼈던 것은 '복잡함'이었어요. 복잡하다는 뜻이 긍정적으로 들리는 단어는 아니지만 홍콩의 역사도 그렇고, 홍콩의 거리를 거닐면서도 그렇고, 굉장히 다양한 인종들이 섞여 사는것도 그렇고 모든 것이 복잡해보이는 곳이었어요.

최근의 시위까지 홍콩은 더욱더 복잡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는데요. 홍콩의 미래는 과연 어떻게 될까요?
여행을 마치면서 던지는 질문 또한 복잡했답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건 모두가 홍콩의 평화를 원한다는 점이에요. 그렇기때문에 저 또한 홍콩시민들이 원하는대로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끝으로 이번 여행은 마무리하도록 할게요!



(마지막으로 홍콩시위에 대한 추가적인 내용들에 대해서 잘 만들어 놓은 영상이 있어 올려놓도록 할게요ㅎㅎ)




다음 홍콩여행을 갈 때에는 완차이와 구룡반도의 침사추이 지역을 가려고 해요ㅎㅎ  

아! 맞다! 그리고 제가 공부하고 있는 딥러닝분야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져있는 '홍콩과기대'도 꼭 방문해 보려고 합니다 ㅎㅎ


지금까지 홍콩편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ㅎㅎ


안녕하세요~ 시간여행자에요!


이번에는 홍콩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쑨원에 대해서 알아보려고해요!

쑨원은 홍콩 뿐만아니라 지금의 대만과도 매우 밀접한 인물이에요. 장제스와는 달리 지금의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의 사람들에게도 굉장히 높게 평가받는 인물이에요.


이번글에서 쑨원에 대한 인물을 이해해가면서 좀 더 극동아시아 역사에 대해 좀 더 깊이 이해해보도록 할게요!

(이번글은 위키백과에 있는 내용들을 대부분 발췌했으니 위키백과를 참고하시는걸 추천합니다~)



<1. 쑨원의 유년기>


쑨원은 1866년 광둥성 광저우에서 빈민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아홉살이 되던 해 동네 서당에 들어가 전통적인 교육을 받던 도중 1879년 장남 쑨메이가 거주하던 하와이로 건너가 영국 성공회 미션스쿨인 이올라니 학교에서 서구식 교육을 받게 되지만 하와이 원주민 출신 아이들과 싸우고 중국 전통 문장을 낭독하는등의 생활로 적응을 잘 하지 못했습니다


<사진1>



하지만 열심히 학업한 끝에 1882년 이올라니 학교를 차석으로 졸업해 하와이 왕국의 칼리카우아 왕으로부터 기념품을 삼는등 뛰어난 성적을 보였습니다. 또한 쑨원은 이때부터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쑨메이는 쑨원이 기독교를 배우고 싶다는 말에 다음 해 그를 고향(광저우)으로 돌려보내게 됩니다 (아마 청나라에서는 유교가 미리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지만, 쑨원은 서양식 생활에 익숙해져서 우상숭배를 타파한다는 취지로 마을의 수호신인 목상을 부숴버리는 등 마찰을 일으켰고 반년이 채 가기전에 쑨원은 결국 홍콩으로 도피(쫓겨남)하고 맙니다




<2. 쑨원의 의사생활>


당시(1884) 홍콩은 영국령이었기 때문에, 홍콩에서 영국 성공회 계열의 퀸즈 칼리지(대학)에서 의술을 공부하고 선교사 찰스 헤이거에게서 세례를 받고 형 쑨메이의 소개로 루무전과 결혼하게 됩니다.


(이곳이 예전에 Queen's college가 있던 곳이라고 해요ㅎㅎ Queen's college는 현재 코즈위에베이로 이전했다고 합니다)


(쑨원은 1887~1892년 의대를 다녔는데요. 당시 의술을 가르치던 학교가 지금의 홍콩대학교 의대의 전신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홍콩대학교를 방문했을 때, 쑨원 동상이 있었고 많은 시민들이 쑨원동상 옆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어요)



이후 1884년 청불전쟁(<- 나중에 베트남에 방문하게 되면 따로 다룰께요 ㅎㅎ)이 발발하고 여기서 청나라가 패배에 가까운 졸전을 벌이자 전통 체제에 불만을 품게 되어 민족주의적(당시 청나라는 만주족(여진족)이었고 광둥성 지방사람들은 본인들이 한족의 뿌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답니다. 그 이유는 제 블로그 글을 읽어보시면 알 수 있어요! ㅎㅎ) 발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그의 혁명사상은 구체적인 무언가가 있다기보다는 단순히 체제 변혁을 꿈꾸는 것이었습니다. 




<3. 청일전쟁의 실패로 삼민주의 기틀이 마련되다; 아시아 최초의 민주주의의 뿌리>


청불전쟁, 아편전쟁의 패배를 보면서 힘없는 청나라에 대한 반발심이 커진 쑨원은 청일전쟁(1894)에서 일본에게 마져 패하자 정상적인 방법의 개혁을 포기하고 공화제를 통한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것을 결심하게 됩니다.


1895 11월 쑨원은 호놀롤루로 건너가 현지 화교(중국에서 태어나서 다른 나라에 정착하여 나라에 활동하는 사람)와 연합해 "달로를 몰아내고 중국을 회복하여 합중정부를 창립하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정치단체인 흥중회를 결성하게 됩니다


      

(흥중회 핵심멤버중 한 명인 융쿠완(Yeung Ku-wan)을 기리는 장소라고 하네요~)


이후 홍콩으로 돌아간 쑨원은 3월부터 반년간 광저우에서의 무장봉기를 준비하나 실행 직전 당국에게 들키면서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이후 일본을 거쳐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흥중회 분회를 설립했고 1896년 런던을 체류하였다가 청 영사관에서 구금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때 대영박물관의 도서관을 드나들며 약 9개월간 독서에 열중하면서 지내게됩니다


이 기간동안 쑨원은 경제학자들인 카를 마르크스와 헨리 조지 등의 저술을 탐독했고 사회 과학의 여러 분야를 연구했는데, 이때부터 그의 혁명이념인 '삼민주의(민권·민족·민생)'의 윤곽이 형성되었습니다.




<4. 변법자강 운동>


광서제(당시 중국 황제)는 당시 서태후의 손아귀에 휘둘리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 개혁 정치를 추구하기 위해 강유위의 갖가지 정책을 지지하게 됩니다강유위의 변법자강책에는 과거 제도 개혁, 조세 개혁, 탐관오리 혁파, 각종 경제 개혁 등이 담겨 있었고, 무술변법을 통해 이중 일부를 실행에 옮기기도 하는데요. 이리하여 서양의 기술만이 아닌 정치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2단계'의 근대화 운동이 추진되었는데, 이를 변법운동이라 합니다


서양 정치를 따라 국회를 만들었고 헌법을 제정하고,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 유학을 중시하는 과거제를 개혁하고 서양 학교를 설립하기도 했으며,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따라 입헌군주제도 도입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변법은 광서제의 미약한 권위에 의존했고, 결국 서태후 등 반개혁파에게 패배해 외국으로 망명을 가는 결과로 끝이 납니다.




<5. 삼민주의 발표>


청나라 말, 열강세력들의 이권침탈과 더불어 국내 상황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는데, 이는 의화단 운동을 유발 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하지만 당시 위안스카이는 열강들의 부탁으로 의화단 운동을 진압하고 외국인을 보호한다. 이 일로 열강의 신임을 얻고 북양대신이 되어 자기 세력을 확대, 신식군대를 증강하여 독립된 정권을 형성하게됩니다. 


흥중회를 설립하고 무장봉기를 계획했지만 실패한 쑨원은 그 후 몇 년간 쑨원은 영국에서 체류하면서 삼민주의의 기틀을 마련하고 일본, 하와이, 베트남, 시암, 미국 등지에서 화교와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혁명 사상을 전파하고, 1905년에는 필리핀, 독일, 프랑스 등의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혁명단체를 조직하게 되었습니다


1905 8월에는 일본 도쿄에서 흥중회, 화흥회 등의 단체를 기반으로 중국혁명동맹회(중국 동맹회)라는 새로운 단체를 창건하고 총리에 추대되었다. 동맹회는 '만주족 축출, 중화 회복, 민국 창립, 토지 조유의 균등'을 강령으로 채택했고, 쑨원은 동맹회의 기관지 《민보》 발간사를 통해 삼민주의를 발표했습니다.


이후 중국동맹회는 총재 쑨원의 지휘를 받으며 수십여차례 봉기를 시도했으나 봉기는 빈번이 실패로 끝나고 쑨원에게는 가혹한 질책과 비판이 뒤따랐는데요. 쑨원은 중국동맹회의 활동을 다른 동지에게 맡기고 출국하여 1911년 무렵까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중국혁명의 당위성을 알리는 한편, 혁명자금과 군자금을 마련하여 동맹회의 활동을 뒤에서 도왔습니다.


쑨원은 유학생 중심으로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하여 청을 타도하고, 민주주의 기반의 공화정을 수립하려는 기틀을 마련합니다. 



<6. 쑨원 그리고 중화민국(대만)>


당시 청나라에서는 청일전쟁 이후 민간이 스스로 주식을 발행하여 마련한 자금으로 철도를 건설하겠다는 '철도 부설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1911, 청조에서는 아무런 설명이나 사전 협의도 없이 철도건설을 국유화시켜 버렸고, 이에 따라 청 정부의 민영철도 국유화 조치에 따른 민중의 봉기가 일어납니다


위안스카이는 이를 계기로 군대를 장악하고 내각 총리대신이 되어 청나라의 실권을 손아귀에 넣는다. 또한 쑨원은 민중의 봉기를 기회로 삼아 민중의 환영 속에 중화민국을 수립하여 임시 대총통으로 취임합니다.


쑨원은 '혁명을 성공시키려면 서구 열강의 간섭을 사전에 막아야 한다'고 판단하여 외교적인 노력을 지속하게 되었어요. 당시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는 여러 국가가 있었는데 공화정을 세우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나라가 영국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영국의 경우는 중국의 공화정 정치에 대해 재야가 동정적이었으나 정부는 미정된 상태였어요


쑨원은 영국 외무성과 회담하고 영국정부에 대하여 청조에 대한 일체의 차관을 중지할 것과 일본에게 청조의 지원을 중지하도록 해주고, 영국 각 속지에서 '쑨원 추방령'을 취소하도록 요구하여 영국정부로부터 확약 받는 대신에 혁명정부는 청나라와 체결한 모든 조약을 인정한다고 하였습니다.



<7. 쑨원과 위안스카이의 만남; 신해혁명>


쑨원은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실질적인 힘이 없었어요. 반대로 당시 위안스카이는 군대를 장악하여 청나라의 실권을 장악한 상태였지만 민중의 지지가 필요한 상황이었죠. 최강의 군대를 거느린 위안스카이와 최대 민중의 지지를 받던 쑨원은 서로 만나게되었고, 위안스카이는 청군과 혁명군(쑨원)의 약함을 알았고 쑨원은 위안스카이의 강함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쑨원은 위안스카이에게 청의 황제를 퇴위시키고 공화국 정부 형태를 받아들인다면 나의 대총통 자리를 이양해 주겠다고이야기 하게되죠.


위안스카이와 쑨원은 서로 합심하여 마지막 황제 푸이를 몰아내는 신해혁명을 일으킵니다. 이로써 청나라는 몰락하게 되었죠.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권력욕 때문에 다시 의회를 해산시키고 쑨원에 대한 체포령을 내립니다. 이 결과, 쑨원은 일본으로 피신하고 위안스카이는 황제로 즉위하게 됩니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체포령에 대한 반대운동이 확대되고 강대국의 압박이 시작었고, 1916 3월 위안스카이는 황제 제도의 취소를 선언하고, 그 해 6월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이 후, 군벌들의 난립으로 혼란에 빠진 중국을 구하고자 쑨원이 다시 귀국했지만, 1925 3월 병으로 생을 마감하게 되고, 쑨원의 바통을 장제스가 이어받게 됩니다


(대만의 고궁박문관을 보면 쑨원의 동상을 볼 수 있는데요. 아마 쑨원을 장제스 이전의 자신들의 초대대통령으로 생각하지 않았나 생각이 들어요 (마치 우리나라 김구 선생님 처럼요))





지금까지 쑨원에 대해서 알아보았어요~


홍콩은 쑨원의 발자취가 많이 남겨져 있어서 쑨원의 역사트레일러라는 투어가 따로 있을정도에요. 나중에 여행가실때 한 번즘 참고하셔도 좋을듯 합니다!

http://www.discoverhongkong.com/us/see-do/tours-walks/self-guided-walks/dr-sun-yat-sen-historical-trail.jsp





사실 위의 글보다는 아래 영상을 통해 쑨원과 청나라의 관계를 파악하시는게 더 도움이 될 것 같아 소개해드립니다 ㅎㅎ















[글 래퍼런스]

https://ko.wikipedia.org/wiki/%EC%91%A8%EC%9B%90

https://namu.wiki/w/%EC%91%A8%EC%9B%90


[사진 래퍼런스]

https://ko.wikipedia.org/wiki/%EA%B4%91%EB%91%A5%EC%84%B1

안녕하세요~ 시간여행자에요!


지난 글에서 영국이 아편전쟁을 통해 홍콩섬, 구룡반도, 신계를 할양받았다고 했죠? 하지만 영국은 홍콩섬을 위주로 발전시켰는데요 이번글에서는 홍콩섬에 대해서 알아보면서 영국인들이 홍콩섬을 어떻게 지배했는지 알아보도록 할게요~!



<1.홍콩섬>


영국이 1차 아편전쟁으로 인한 난진조약 통해 처음으로 청나라에게 할양받은 지역이에요. 그래서 영국은 이곳부터 자신들의 문화를 정착시키게 만들었어요. 아래 사진은 1915년 지도인데, 난징조약이후에 홍콩섬을 할양받고 도시화를 시키기 시작했는데 홍콩섬 북부를 중심으로 '퀸즈타운'을 구축했다고 해요. 영국여왕을 기리기 위해 퀸즈타운이라고 지었는데요. 1843년에는 영국여왕의 이름인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을 본따 빅토리아 시티로 변경했다고 합니다.


당시 거의 모든 정부 기관의 본부가 놓여져 있기 때문에영국의 식민지 시대에는 홍콩의 수도로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사진1>                                                         <사진2>



1857, 영국 정부는 빅토리아 시티의 범위를 확대해, 4개의 지구인 4완(상완(셩완), 서완(시완), 중완(센트럴), 하완(완짜이),으로 분활하게 되었는데요. 1903, 빅토리아 시티의 경계를 명시하기 위해 경계석이 설치되었고 현재도 6개의 경계석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사진3>                                                          <사진4>                             



여기서부터는 서완, 성완, 중완(센트럴), 하완(완짜이)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할거에요. 각 지역의 명소를 알아보면서 영국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펴볼께요~










1) 서완(홍콩대학교)


서완에 홍콩대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홍공대학역 (HKU station)이 서환에 가깝기 때문에 서환 카테고리에 넣어봤어요. 




1910년 열강들이 중국 각지에 대학을 세우는 것을 보고 당시 홍콩 총독이었던 프레드 릭 루가드는 홍콩에도 대학을 세우자고 제안해 1910~1912년 이라는 기간을 거쳐 홍콩대학교를 설립합니다. 이곳에서 졸업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쑨원이에요. (쑨원에 대한 설명은 다음글에서 다루도록 할게요~!)


한족들 자체가 인문학을 중시했기 때문에 홍콩대 역시 초기부터 인문학 중심으로 학교를 발전시켰다고해요. 영국인들은 아직까지도 중국사 연구를 할때에는 사료 수집 및 해석을 홍콩대에서 집중적으로 했다고 합니다. 또한 중국대륙이 공산화된 후 중국사 관련 양질의 사료들은 죄다 홍콩대에 와있다고 하네요.


아직까지 미국 및 영국에서 중국사 사료는 전적으로 홍콩대 및 홍콩중문대싱가포르 국립대학국립 대만대학 등에 의존한다고 합니다. (홍콩대의 법학부 및 대학원(LLM)은 아시아 최고 수준이라고 해요)


(홍콩대를 방문해서 한 컷 찍었어요. 모두들 줄을 서서 사진을 찍더라구요 ㅎㅎ)


1941년에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일본군이 홍콩을 점령하자 1945년까지 홍콩대는 폐쇄되었다고 합니다.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면서 중국 본토의 유학생들이 오게 됐는데 40% 정도는 졸업 후에 홍콩에 취직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중국대학의 학위는 홍콩에서 대졸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인데요애초 홍콩에서는 대륙 출신의 경우 홍콩이나 미국영국 등에서 학교를 나오지 않으면 취업비자조차 안 준다고 한다고 하네요. (중국대륙의 여권으로는 무비자로 갈 수 있는 나라가 거의 없다고도 합니다.)


홍콩대학은 우리나라의 서울대와 성격이 유사하고, 홍콩과기대는 우리나라의 카이스트와 성격이 유사하다고 하네요.  홍콩 내 자체 대학 순위에서 1위를, 2019 QS 세계대학 순위에서 25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고 합니다.










2) 상완(셩완)


성완은 1842년 영국군이 홍콩에 처음 상륙할 당시 자리잡았던 지역 중 하나이며빅토리아 시티의 일부였어요셩완지역은 원주민들이 모여 있는 최초의 지역구였고 무역항이었기에 건어물,약재,비단,,골동품 등이 당연히 많았겠지요지금현재도 셩완지역은 약재나 골동품(헐리우드 로드),건어물 가게들이 즐비하게 모여 있습니다.

 




2-1) Possesion Point (Possession street)& Hollywood Road Park

1841 1 25일 영국군이 홍콩 땅에 발을 내딛으면서 영국령임을 선언한 곳이에요




본래에는 항구였으나 주변 바다를 점차 매립하면서 육지로 만들어진 후현재는 식민시절 흔적이 아직 남아있는 유적지를 중심으로 세련된 레스토랑과 부티끄샵들이 즐비합니다.



2-2) 웨스턴 마켓 

영국군이 본격적으로 주둔하기 시작하면서(ß웨스턴이라는 이름을 붙인 유래) 1906년에 지어진 식민지 초기 홍콩 섬 전역의 물류 유통 중심지였지만, 나중에 상환 상가로용도가 변경되었는데요. 1996년에는 쇼핑센터로 새 단장을 마쳤다고해요.




       

(웨스턴 마켓을 방문하실때에는 트램을 이용하세요! ㅎㅎ)



2-3) 쑨원 기념관

중화민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쑨원을 기리는 박물관이에요. 과거에 쑨원이 청년시절을 보냈던 집을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어요


3층으로 이루어진 건물로 1층에는 쑨원의 동상이 있고, 2층에는 쑨원이 연관되었던 각종 혁명에 대한 문서 등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같은 포즈를 취해봤어요 ㅎㅎ)



쑨원에게 홍콩은 자신이 공부를 했던 곳이면서, 중화민국을 공화국으로 선포하도록 만든 18년 동안의 시간 동안 그의 근거지가 되어 준 기반이었어요. (쑨원에 대한 내용은 다음글을 참고해주세요~)



2-4) Pottinger Street (포팅어 거리)

홍콩에서 가장 오래된 돌계단 길이자 홍콩의 1급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거리입니다. 일반계단과는 달리 낮은 석판이 깔려있는데 계단으로 하지 않은 이유는 예전에 이곳으로 가마꾼들이 많이 왔다갔다 했기 때문이라고 해요.




포팅거 스트리트라는 명칭은 서 홍콩의 첫 통치자인 헨리 엘드레드 커웬 포팅거 경의 이름에서 따왔어요. 자갈 계단으로 유명한 이곳은 이 지역 가장 오래된 거리 중 하나로 1850년대에 형성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2-5) 캣 스트릿

영국군 내 인도인들이 홍콩으로 건너와 경찰관으로 근무한적이 많았는데요. 당시 경찰본부 지역 주위로 골동품과 중고 물품을 파는 시장으로 변했다고 해요. 


광둥어로 훔친 물건을 'rat goods(쥐 물건)'이라 부르는데, 이런 물건을 사는 사람들을 'cat'이라고 불렀다고해요 ㅎㅎ. 이런 배경 때문에 이 거리는 'cat street'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어요.


이곳을 방문하긴 했는데 사진을 찍지는 못했어요 ㅜㅜ 그런데 분위기가 정말 이색적이에요. 이곳에서 옛날 화폐로 쓰인 '은'을 본적이 있는데, 다음에 방문할 때에는 꼭 사야 겠어요 ㅜㅜ ㅎㅎ








3) 중완(센트럴)


영어 지명인 '센트럴' (Central) 80년대 초 홍콩 지하철 공도 선 개통을 앞두고 중완 역의 영어명칭을 '센트럴'로 번역하여 붙인 이후로 정착화된비교적 얼마되지 않은 지명이에요.


1841년 영국군이 처음으로 상완(성완)의 수항구에 발을 내딛었는데, 이들은 홍콩 섬 북부 연안에 시가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하고오늘날 중완 일대를 주요 군시설과 행정청사 부지로 삼았어요이후 서양인과 중국인이 무역과 거주를 위해 이 일대에 몰려들기 시작하였고 1842년에는 코크레인 가와 그레이엄 가 사이에 '캔턴 바자르' (지금의 홍콩 중앙시장)을 형성하였다고 해요


그러나 머지않아 중국인들은 성완 일대에만 살도록 제한하고중완은 서양인 거주 전용구역이 되었다고 합니다중완에는 서양 양식을 띄고 위생시설을 갖춘 서양식 건물이 속속 들어섰으며이른바 빅토리아 시티의 영역이 거의 대부분을 잠식하고 있었습니다



수십년 전만 해도 중완 부근의 영국 군시설은 계속해서 남아있었지만, 1980년대 군시설 철수를 계기로 수차례에 걸친 재개발 작업이 이뤄졌어요


센트럴에는 관광지가 많이 있는데요. 이러한 장소들 모두 영국과 관련있어요. 이 부분은 제가 영상자료를 첨부하는게 더 좋을 것 같아서 영상을 보시길 추천드릴게요!



3-1) HSBC 은행, 황후상광장


(1:35~3:45)



3-2) 미드레벨, 소호


3-3) 성 요한 성당


홍콩에 주둔하는 영국군의 신앙생활을 위해 1847년 빅토리아 최초의 주교인 조지 스미스가 공사를 시작해 1849년에 완공시켰으며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로도 유명합니다.



3-4) 반청 혁명 운동 기념공원(백자리공원)

사진을 보면 변발의 긴 머리를 자르는 동상이 있는데, 청나라(만주족)은 변발을 상징하고 있었으므로 제국주의 침략을 당한 무능한 청나라를 타파하자는 의미로 세워졌다고해요.














4) 하완(완짜이)


홍콩에서도 평균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이라고 하는데요. 업무가인 중완, 상업지구인 코즈웨이베이에 끼어 있는 지구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홍콩의 출입 사무를 담당하는 입경사무대루가 완쯔에 있다. 이 외에 경찰 본부·세무 당국 등, 인접하는 중완과 함께 홍콩의 정치의 중추가 많이 완쯔에 모여 있다고 해요.

 

4-1) 애드미럴티

해군 본부라는 의미를 가진 애드미럴티(Admiralty)라는 영어식 명칭은 한때 이곳에 있던 영국 해군 기지 애드미럴티 독 (Admiralty Dock)에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4-2) 홍콩정부청사 (Central government)


홍콩정부청사는 2014 12월에 굉장히 많은 해외 언론에 소개된 바 있는데요. 아래영상을 참고해주세요~



영국이 중국에게 홍콩을 반환할 당시 2047년까지는 일국양제(민주주의, 공산주의 공존)를 약속받은 '홍콩반환협정'이 있었는데요. 영국 하원의원들이 중국 정부가홍콩 반환협정이행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홍콩을 방문하려던 영국 하원의원들의 입국을 거부했다고도 합니다. 이 때문에 홍콩 시위대는 도심 정부청사 주변 봉쇄에 나서 경찰과 물리적 충돌을 빚는 등 홍콩 사태가 다시 격화되었다고 해요.


홍콩 민주화 시위대들은 지난 30일 오후 늦게부터 도심 애드미럴티에 있는 시 정부청사 포위에 나서 이를 저지하려는 경찰과 충돌을 빚었어요.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2047 7 1 50년에 도달하더라도, 자치권은 더 연장될 것이라고 보는 것이 주류이기는 하지만 현재 상황으로 봐서는 2047년이면 자치권 연장이 되더라도 홍콩은 실질적으로는 일개 지방도시로 격하될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이미 상하이, 베이징, 선전 등 중국 대륙의 대도시들이 홍콩의 경제력을 추월한지 오래이고, 궁극적으로 홍콩 내의 표현의 자유가 심히 퇴색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요.



2) 눈데이건 (Noon Day gun)


영국이 점령한 후 홍콩은 동 서양을 이어주는 무역항이 되었기 때문에 해적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곳이되었어요. 자딘 매시선(영국계 기업) 회사는 해적의 공격에 대비해서 자체적으로 대포를 설치했는데요. 더 나아가 자딘 매시선 회사는 자신들의 사장이 탄 배가 빅토리아 항을 지날 때마다 예포를 쏘기 까지 한다


그런데, 새로 부임한 신임 해군제독이 대포 소리에 놀라는데 그 이유는 포는 군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독이 매일 정오에 시간을 알리는 대포를 쏘는 벌(?)을 내렸다고 해요.


이후, 1800년 대 아편을 실은 배가 들어올 때마다 이를 알리기 위해 축하 예포를 발사하는 것을 기원으로 여전히 지금까지 (홍콩의 일제강점기(1941~1947)를 제외하고) 매일 오후 12시에 축포를 울린다고 합니다 


 



하루에 딱 한 번 정오(12:00)에 발포(포는 세계1차대전 때 사용했더 포라고 한다)하고 20분 정도 포 주변을 개방하기 때문에 시간에 맞춰 갈 필요가 있어요~ (소리가 엄청크니 귀를 막아야해요 ㅎㅎ)







지금까지 홍콩섬에 대해서 알아보았어요. 이번 홍콩섬의 역사를 통해서 여행해보니 왜 지금 중국과 마찰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아보았던 것 같아요. 


중국 입장에서는 본래 홍콩이 자신들의 땅이라는 관점이 있는거 같고, 홍콩관점에서 자신들은 한족의 뿌리를 이어받고 쑨원과 영국의 민주주의가 자리잡고 있어 중국과는 완전히 다른 민족이라고 인식하는 부분이 있는것 같아요.



아! 그리고 홍콩에 대한 전반적인 영상을 보시고 싶으시다면 아래영상을 추천할테니 참고하세요!





[사진 래퍼런스]

사진1

https://en.wikipedia.org/wiki/Victoria,_Hong_Kong

사진2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Tcitp_d154_city_of_victoria.jpg

사진3

https://gwulo.com/hong-kong-victoria-city-boundary



[글 래퍼런스]

https://namu.wiki/w/%EC%98%81%EA%B5%AD%EB%A0%B9%20%ED%99%8D%EC%BD%A9

https://ko.wikipedia.org/wiki/%EB%B9%85%ED%86%A0%EB%A6%AC%EC%95%84%EC%8B%9C%ED%8B%B0

https://www.chinaodysseytours.com/hong-kong-independent-travel/maps.html

https://namu.wiki/w/%EA%B5%AC%EB%A3%A1%EB%B0%98%EB%8F%84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ktb1&logNo=220736683298&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kr%2F

http://jobnjoy.com/portal/job/tip_view.jsp?nidx=235190&depth1=1&depth2=4

https://www.hotcourses.kr/study-in-hongkong/applying-to-university/hk-universities-top-8/

https://www.topuniversities.com/universities/university-hong-kong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412012144475#csidxb3adec82b832a5fab0238f6a45f3fb0

안녕하세요~ 시간여행자에요!


이번글에서는 홍차가 왜 영국의 최대 수입품이었으며 미국의 독립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 설명해보도록 할께요~~~




<1. 캐서린 공주와 영국 상류사회>


영국 국왕 찰스 2 (1630~1685)는 시집을 간 포르투갈의 캐서린 공주가 결혼 지참금(여성이 시집갈 때 친정에서 가져가는 돈이나 물건, 즉 남편에게 혼수품을 주는 개념)으로 차와 설탕을 가지고 갑니다. 캐서린 공주는 차에 설탕을 넣어 마시는 방법을 영국 상류사회에 유행시키게 했는데요. 


이 후 점차 상류사회에서 일반인들에게까지 차가 확대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영국사람들은 아침과 저녁 두 끼니만 먹고 아침 메뉴로는 비교적 간단한 빵, 계란과 맥주를 즐겼고 저녁은 일과를 마친 뒤 고기를 배불리 먹곤 했다고 하는데요


따라서 저녁 식사 전까지 상당히 긴 시간 동안 배고픔을 참아야 했는데 1820년 영국 베드포드 공작부인이 차와 더불어 샌드위치나 스콘 등의 가벼운 식사거리를 준비하여 친구들을 초대해 티파티를 열었던 것이 에프터눈티의 시초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점차 집밖 정원에서 테이블과 의자를 놓고 은으로 만든 티포트와 간편한 식사거리를 준비하여 사교 모임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죠.





<2. 영국 커피농장의 실패>


그 외에도 17세기부터 프랑스와의 주도권 다툼이 커피라는 작물로 넘어오면서 영국 커피농장은 대부분 실패하고 프랑스 식민지에 있던 커피농장들은 크게 성공을 하게 되는데요. 이에 영국에서는 중국과의 ''수입을 거의 독점하다시피하여 유럽에 차문화를 유행시키면서 커피로 인한 손실을 차로써 만회를 하게 됩니다


1850년경에는 일반인들에 까지 널리 퍼지게 되면서 영국의 고유한 문화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티타임을 중심으로 일찍부터 사교문화를 꽃피워 왔던 영국은 하루 7~8회 정도 티타임을 가질 만큼 홍차를 사랑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영국은 청나라로부터 엄청난 양의 차를 수입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 홍콩이 있는 광둥성 근처에서 차를 수입한걸까요??


광동(광둥()) 13행이란 청나라가 서양과 교역을 허가한 13개 상점으로 동, 서양의 문화가 교류하는 교차점이라는 뜻인데요. 13개의 주요상점들에는 은행(은을 거래하는 곳; 은행의 어원), (홍차), (도자기), (향신료)행 등이 있었는데, 이러한 수출품들은 중국에서 홍콩을 들렸다가 서유럽으로 가게되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은 돈이 되었던 것이 였던 것이죠.




<3. 애프터눈 티와 보스턴 차 사건>


홍차수입으로 인해 힘들어진 재정난을 막고자 당시 미대륙으로 진출했던 영국은 미국에 차문화를 전파시키고, 파는 차에 세금을 크게 부과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영국인들은 애프터눈 티는 매일 마시니까 세금을 낼 수밖에 없겠지라는 꾀를 낸것이죠.


세금을 내라고 했다고 반발했던건 아니었습니다. 결정적인 이유는 관세를 매기는 방식 때문이었죠. 원래 관세를 때려도 영국땅이라는 개념에서는 국내관세를 매겨야되는데 영국의회는 미대륙에 국제관세를 매겨 엄청난 이득을 취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미국영토에 있는 주민들이 보스턴항에 정박한 배에 실려 있던 홍차 상자들을 바다에 버리면서 보스턴 차사건(1773)’이 발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미국 독립운동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아메리카노가 탄생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홍차의 수입이 어려워진 미국은 홍차대신 커피를 마시게 되었고, 커피가 홍차를 대신하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홍차를 마시던 습관이 있어서 짙은 에스프레소 대신에 에스프레소에 물을 첨가해 묽게 하여 홍차의 진하기와 비슷한 아메리카노를 즐기게 되었다고 합니다이 때부터 미국은 최대 커피 소비국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번장에서는 여행객들이 홍콩을 방문하면 꼭 애프터눈 티를 마시고 오시기에 홍차에 대한 재밌는 에피소드를 알아보았어요~


다음장에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영국이 홍콩을 어떻게 지배했는지 설명해보도록 할께요~!!!





[글 래퍼런스]

http://news.mk.co.kr/newsRead.php?no=988681&year=2014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anubecafe&logNo=220838475735&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


안녕하세요~ 시간여행자에요!


이번에는 영국이 청나라에게 아편을 판매하면서 어떤 사건들이 일어났는지 알아보도록 할거에요!






<1. 영국의 동인도회사 설립>


유럽열강들과 경쟁하던 영국은 인도에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게 됩니다. 광동 성 광저우에 무역항을 설치한 후 무역을 해나가긴 했지만, 1793년 청나라 황제 건륭제는 영국에게 원하면 문호는 열어주는데 너희 물건을 필요하지 않다고 이야기 합니다


<사진1>



이렇게 이야기 했던 이유는 당시 영국이 중국에 수출하려고 했던 품목은 면화시계보석모직물 등이고영국이 중국으로부터 수입하려고 했던 것은 도자기비단은이었기 때문인데요그런데 당시 중국 중하류층들이 입고 있던 의복이 면화베였으며 상류충의 의복이 비단이었기 때문에 영국의 수출품이 매력이 없던 것이었죠. 반대로 차비단은 영국인들에게는 필수품이었지만요당시 광둥 13행의 주요 상점들 은행(은을 거래), 차행(차를 거래), 도행(도자기를 거래), 약행(약을 거래이 있었다고 합니다.







<2. 청나라에게 아편판매>


이전글에서 설명했듯이 당시 영국은 '은'을 모으는데 혈안이었지만 중국과의 교역에서 오히려 은이 유출되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중세 유럽에서는 실크로드(비단길: 중국에서 중앙아시아, 인도로 이어지는 교역로를 통해 거래되던 교역품이 주로 비단이었던 것에서 유래) 를 통해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를 비롯한 갖가지 수입 명품을 사기 위해 금과 은을 지불하면서 금속화폐를 탕진했기 때문이죠. 그 중에서 특히 은의 유출이 컸는데, 그 이유는 은이 유럽에서보다 중국에서 상대적으로 고평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전글인에서 설명드렸듯이 은이 부족한 유럽인들은 노예와 마약을 불법적으로 거래하면서 수익을 높이게 됩니다. 그래서 아프리카들을 정복하고 사람들을 노예로 삼기시작했다. 그리고 영국은 마약을 국가수출품으로 만들어 수출하기 시작합니다


인도의 동인도회사에서 인도산 양귀비를 싱가포르에서 제조해서 부패한 청나라 관료들의 도움을 받아 중국에 판매하기 시작하죠. 그외에 당시 영국에 대한 중국의 최대수출품은 차()였고 (왜 차가 최대 수출품이었는지는 다음장에서 설명할께요!), 영국의 주요수출품은 모직물과 인도산 면화였습니다


양국의 무역수지는 중국의 수출초과 상태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영국으로서는 차 수입을 결제할 은()이 부족하게 되었죠. , 차를 구입하는데 은을 모두 써버려서 국가에 경제에 큰 타격을 입게 된 것입니다. 이에 따라 영국은 중국에 아편을 수출해 무역적자를 해소하려 했습니다







<3.아편전쟁의 시작과 난진조약>


당시 청나라에서는 담배도 금지가 되었고, 빈부격차도 극도로 심했기 때문에 사회가 절망하게 되자 도박과 마약이 흥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영국인들이 청나라인들에게 아편을 판매하기 시작했죠. 하지만 나중에 문제가 되자 청나라 황실에서는 임칙서를 보내 아편거래를 못하게 만들었죠. 당시 임칙서는 영국에서 온 마약을 몰수해 바다에 투척했습니다.


<사진2>



 이러한 일을 겪은 영국은 1차 아편전쟁 (1840)을 일으키고 압도적인 군사 기술력으로 청나라를 몰살시키게 됩니다. 이 전쟁은 1842년에 영국의 승리로 끝났고, 난징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난징조약으로 영국은 홍콩섬을 할양받고,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등 다섯 개 항구를 강제적으로 개항시키게 됩니다.



난징조약 - 난징 조약(南京條約, 1842 8 29) 1840년부터 1842년까지, 2년간 벌어진 제1차 아편 전쟁을 끝내기 위해 1842 8 29일 청나라와 영국과의 사이에 맺은 불평등 조약


1.양국은 평화, 친목을 유지하며 상호간 재산·생명의 보호를 받는다.

2.청나라와 영국 두 나라 관리는 대등한 자격으로 교섭을 한다.

3.홍콩 섬을 영국에 할양한다.

4.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등 다섯 개 항구를 개항한다.

5.개항장에 영국인 가족의 거주를 허가하고, 영사관을 설치한다. (조계를 허용한다.)

6.전비배상금으로 1,200만 달러와, 몰수당한 아편의 보상금으로 2100만 달러를 영국에 지불한다.

7.행상(行商) , 공행(公行)과 같은 독점상인을 폐지한다. 또한 공행이 영국 상인들에게 진 빚에 대한 보상금으로 300만 달러를 지불한다.

8.수출입 상품에 대한 관세율은 양국이 협의하여 결정한다.




사실 1차 아편전쟁을 통해서는 홍콩섬만 할양받고 현재 홍콩을 이루고 있는 나머지 구역을 할양받지 못한상태였어요.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1차 아편전쟁을 통해 홍콩섬을 할양받은 거에요. 실제로 홍콩은 홍콩섬과 구룡반도, 신계로 구성되어있는데요. 그럼 어떻게 나머지 부분들을 할양받을 수 있었을까요?


   

<사진3>                                                       <사진4>






<4. 2차 아편전쟁(애로호 전쟁)>


앞서 영국이 홍콩섬을 할양받았다고 했죠? 영국은 1차 아편전쟁 후 홍콩을 기점으로 무역을 활발히 펼치려 했지만 청나라는 경제적으로 자급자족 성격이 강했습니다. 또한 중국의 면포는 품질이 우수하여 영국의 주력상품인 모직물과 인도산 면화는 상대가 되지 못했던거죠. (당시 프랑스도 청나라에서 무역성과가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1차 아편전쟁 이후 광둥을 중심으로 영국에 대한 항쟁운동이 전개되었는데요. 1856년 10월 청나라 관원은 해적선으로 보이는 애로호라는 선박을 단속했습니다. 그런데 해당 선박은 중국인 소유의 해적선이었는데, 배에는 영국국기가 달려있었다고해요. 본래 그 배에는 중국인선원 13명과 영국인 선장 1명이 있었는데 체포시에는 영국인 선장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체포과정에서 청나라 관료가 영국국기를 불태워 바다에 던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영국은 이에 대해 국가모독의 죄명을 씌워 배상금과 사과문을 내라고 하였으나 당시 청나라는 해당 배는 중국인 소유고 해적선 자체가 불법이니 배상과 사과를 할 필요가 없다며 강하게 일축했어요. 이를 빌미로 영국과 프랑스는 연합군을 형성하고 1857년 12월 광저우를 점령하고 청나라 관료를 포로로 잡습니다.


<사진5>



이렇게 양측이 대립하는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본격적인 2차 아편전쟁을 벌여 영국, 프랑스 연합이 승리하게 됩니다. 그 결과 1858년 톈진조약을 맺게됩니다. 


1. 전쟁에 대한 배상금

2. 외교관을 베이징에 주재하게 할 것

3. 외국인의 중국 여행과 무역의 자유 보장

4. 기독교 포교의 자유와 선교사 보호

5. 뉴장(만저우), 덩저우(산둥반도), 한커우(장강 연안), 주장(장강 연안), 전장(장강 연안), 타이난(타이완), 단수이(타이완), 차오저우(광둥성 동부, 이후 샨토로 변경), 치웅저우(하이난 섬), 장닝(장강 연안) 등 10개의 항구를 개방할 것








<3. 1차 베이징 조약 & 2차 베이징 조약>


1) 1차 베이징 조약

청나라 조정에서는 톈진조약이 불평등 조약이라고 주장하면서 영프 연합군을 다시 방해하게됩니다. 그러자 영프 연합군은 다시 베이징까지 밀고 올라가 베이징까지 점령하게 됩니다. 이때 1859년 베이징 조약을 맺게 되는데, 베이징 조약을 통해 구룡반도(Kowloon)를 할양받게 됩니다.


 

<사진6>



2) 2차 베이징 조약

청일전쟁 이후 영국이 홍콩 방위 목적으로 중국과 교섭을 벌이게 됩니다. 이때 2차 베이징 조약(1898)을 맺고 홍콩의 나머지 부분인 신계(The New Territories)를 할양을 받게 됩니다.



이로써 영국에 의한 홍콩 지배는 1842~1997년까지 진행되게 됩니다. 




다음글에서는 잠시 홍차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할꺼에요! 재미있는 스토리가 있으니 기대해주세요!






[사진 래퍼런스]

사진1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a/print.do?levelId=ta_h62_0030_0010_0010&whereStr=

사진2

http://study.zum.com/book/12725

사진3

https://en.wikipedia.org/wiki/Hong_Kong

사진4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alname32&logNo=221638298615

사진5

http://m.blog.daum.net/guidesyj/289

사진6

https://namu.moe/w/%ED%99%8D%EC%BD%A9/%EA%B4%80%EA%B4%91



[글 래퍼런스]

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C%98%81_%EC%A0%9C%EA%B5%AD

http://news.mk.co.kr/newsRead.php?no=988681&year=2014

https://brunch.co.kr/@rlfrjsdn/26

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D%8E%B8_%EC%A0%84%EC%9F%81

https://ko.wikipedia.org/wiki/%EB%82%9C%EC%A7%95_%EC%A1%B0%EC%95%BD


안녕하세요! 시간여행자에요~


영국이 홍콩을 지배하게 된 이유는 아편전쟁 때문이에요. 그런데, 이 아편전쟁은 왜 일어난 것 일까요?

그 이유를 알기위해서는 화폐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번 장에서는 화폐의 역사를 통해 아편전쟁이 일어난 이유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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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래 글들은 대부분 "TVN 어쩌다 어른; 조승연 작가편; 화폐의기원"이라는 곳에서 시청하면 훨씬 이해도 잘되고 생동감 있게 내용을 들으실 수 있으실거에요. 그래서 꼭 한 번 시청하시는 걸 추천드려요!


작가님께서 오마이스쿨과 함께 따로 유튜브에 무료영상을 올린 것 도 있으니 시청하시면 더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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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의 역사]


<1. 최초의 화폐; 인간>


대도시가 생기기 전에는 서로 물물교환이 주가 되었어요. 한쪽에서 돼지가 필요해서 돼지를 빌리면, 돼지를 빌려준 쪽에서 나중에 쌀이 필요하면 쌀을 빌리는 식이었죠. 하지만,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시작되고 대도시가 생기면서 익명성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이는 공동체의 개념이 약화시켰어요. 때문에 옆에 사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 경우도 생기고, 어느덧 이사를 해 사라져 버리는 경우도 생기는 것이었죠.


그래서, 이때부터 점토에 빌려주고 빌린 것들에 대해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점토에 기록하고 들고 다니기가 너무 무거웠기 때문에 나중에는 토큰같은 것을 실로 엮어 팔찌로 만들어 들고 다니면서 자신의 물건을 빌려간 사람에게 보여주게 되었어요


하지만, 이 당시에도 빚을 갚는 형태는 물물교환이었다. 그래서 A B C에게 양10마리를 빌려줬는데, C A에게는 쌀 5포대, B에게는 쌀 7포대 주는일이 생겨 갈등이 벌어지는 일이 생겼다. 그래서, 이러한 불공정 거래를 없애기 위해 도량형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메소포타미아는 소한 마리를 빌리면 소 한 마리를 빌렸다고 하지말고 은 50g을 빌렸다고 기록하라고 명명하면서 가치에 대한 평가를 무게로 통일하게 된 것 이죠


그런데 당시 은 워낙 귀했기 때문에 화폐로 기능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도량형이 발표된 후 빌려준 물건을 갚지 못했을 때에는 갚지 못한 집안의 딸을 납치하거나 가장을 죽였다. , 은이 담보가 아닌 인간이 담보인 사회였던 셈이죠 (인간화폐의 시대 도래).






<2. 최초의 이자개념; 노예제도>


인간화폐가 나중에 노예제도로 발전하게 되는데, 그것에 크게 기여한 것이 지구라트라는 곳이에요지구라트라는 곳은 흉년에 대비하기 위해 비상식량을 저축하는 곳이자 신전역할을 하기도 했는데요. 당시 메소포타미아인들은 강 주변에서 살면서 농경사회를 이루었는데, 당시 홍수와 가뭄을 피하기 위해 지구라트에 곡식을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고해요


가뭄이나 홍수가 들어 주민들이 곡식을 재배하지 못할 때면 종자 씨를 구하기 위해 지구라트에가서 빌리고는 했는데, 지구라트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종자 씨 하나를 주면 다섯 알갱이가 나오니, 나중에 갚을 때 두 알갱이로 갚어라라는 이자 개념을 도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보통 흉년과 풍년이 번갈아 일어나지 않고 흉년이 연달아 일어나는데, 이런 경우에는 주민들이 이자만 늘어나는 사태가 발행하고 빚이라는 것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노예가 되기 시작하게 되었는데요. 이것을 통해 노예 사회 (1% 지배계층, 99% 노예) 가 시작되기 시작하게 됩니다. 당시에도 여성은 여전히 아버지의 소유재산으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빚이 많아져서 파산을 하게 되면 그 집안 여성들을 데려와 윤락업소에 판매를 하게 됩니다





<3. 군사화폐 그리고 세금의 시작; 은> 


노예 화폐시대에는 굉장히 긴 주기를 가지고 노예들이 한 번씩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노예가 화폐인 사회는 크게 한 번씩 기반이 흔들리곤 했어요. 그래서 왕들은 시민계급을 대규모 군대조직으로 만들어 반란을 일으키는 노예들을 죽였습니다


이러한 반란을 막는 또 하나의 방법은 노예를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었어요. 알렉산더 대왕은 이때부터 은을 화폐로 만들어 시민계급에게 뿌림으로써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해주면서 군대조직을 더 강화시켰어요. 당시 '은'이 귀했기 때문에 이때부터 다른 나라의 신전을 공격하는 정복전쟁(이집트, 페르시아 등)을 일으킵니다 (보통 신전에 많이 '은'이 있었다고해요). 알렉산더 대왕은 이 때부터 정복전쟁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티레, 이집트, 페르시아 등). 


약탈한 금은 보화는 녹여 동전으로 발행하기 되는데 이것이 최초의 금속 화폐에요. 당시 군사들은 소금(salt) or 은화를 봉금(salary)로 받았다 (소금은 생필품이었음으로 시장가치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은화가 온전히 화폐로 통용되지는 않았다고해요. 예를 들어, 고대 잉카부족에서는 딱딱한 은이 어떤 가치를 지니지 못했기 때문에 은화를 통해 거래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은화를 건내주면 옷, 식량 등을 사입거나 사먹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는데, 지배계층들은 이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 세금이라는 것을 은화로 징수하기 시작해서 모든 마을 부족 사람들이 은화를 사용하겠금 만들었어요. 그래서 모든 마을과 부족들이 군사들에게 생필품이나 무기 등을 팔 수있게 함으로써 모든 마을과 부족들을 보급처로 만들었죠. 이 후로, ‘이 화폐로써 자리잡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노예의 반란을 근본적으로 없애는 해결할 순 없었어요. 왜냐하면 빚이 생기는 이유는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자가 때문이에요. 또한, 농민들이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군대에 들어갔지만 긴 시간의 군대생활과 지속적인 이자로 빚이 늘어나는 이중고 생활을 겪게됩니다. 그래서 결국 군사화폐의 시대는 종결이 되었죠.





<4.어음화폐의 출현; 예수, 무하마드>


군사화폐의 문제는 이자로 인한 사회적 시스템의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이러한 이자를 받으면 안된다고 주장한 사람이 성자로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그 사람이 기독교의 창시자인 예수그리고 이슬람의 창시자인 무함마드’에요


예수는 고리대금 없자들을 내쫓으면서 이러한 스토리가 유럽전역에 퍼지게 됩니다. 그래서 당시 많은 대중들이 예수와 무함마드의 말을 따르고 그들의 행적을 기리기 위한 운동들을 했죠. 이자를 받는 장소인 신전(앞서 언급한 지구르타)을 파괴하고 예수와 무함마드가 한 말들의 일부분을 법제화 (ex: 성경-이자를 없애라) 하도록 주장하고, 종교화하기 시작했어요


은행역할을 하던 신전이 폐쇠되자 유럽은 금융업자들이 돈을 숨기게 되고 통화시스템이 무너지게되어 자급자족 사회인 봉건사회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이슬람은 어음이라는 제도를 통해 화폐제도를 유지하게 되는데요. 당시 어음은 지금 돈을 빌리고 나중에 돈을 갚겠다라는 약속증이었어요


어음을 돌려받을 때 수수료를 천원추가 하게 되는데 (사실 이것이 이자나 다름없지만), 당시 굉장히 괜찮은 아이디어였다고 합니다. 예를들어, A(이슬람) 상인이 B(유럽) 상인에게 어음을 돌려받으려고 할 때, B상인이 C(중국)상인에게 어음증을 내주었으니 C상인에게 어음증을 받고 자신(B(유럽)상인)에게는 그냥 물건을 주면 된다고 하는 식으로 진행되어 결국 이슬라 어음 시스템이 국제적인 화폐 시스템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상인들은 유럽과 중국의 중심점인 말레시아 말라카에 거대한 어음거래소 (유네스코) 를 설치하게 되고, 나중에 말레이시아가 강성해지자 어음거래소를 남쪽으로 조금 내려 쿠알라룸푸(중동 산업과 금융 중심가 됨) 에다 이전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이슬람은 신용거래를 한셈인데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모든 이슬람사람들이 메카에 가서 상인들의 신용에 대해 이야기 하기 때문에 신용을 지킬 수 밖에 없었다고해요. 이렇게 이자도 받지 않고 신용으로 거래하는 상인들이 존경받는 시대가 도래했고 알라바바나 신밧드라는 이름으로 남겨져 있었다고 하네요


하지만, 어음화폐는 개인이 화폐를 발행한 다는 단점이 있기 때문에 대규모 군대 조직이 생기기 어렵고 국방력이 약화 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단점으로 인해 서서히 아랍제국이 몰락하게 되고 어음화폐가 사라지게 됩니다.




<5. 유태인과 제국주의>


아랍에서는 어음화폐제도가 무너졌지만, 유럽인들이 어음화폐제도를 고리대금으로 악용하게 되요. 당시 유럽사회는 봉건제도로써 영주들과 계급제도가 있었는데 (귀족, 기사, 농민), 이슬람 국가들이 세력을 넓히자 유럽 최대 권력자인 교황이 기사들에게 당시 무역 교역 중심지인 예루살렘에 침략해서 얻는 땅도 개인소유로 할 수 있게 하고, 이전 죄를 사해주는 면죄부를 주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기사들이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가는 길목에서 숙박하고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이를 제공해주 집단이 템플 기사단이었어요. 각 지역에 성당에서 템플 기사단이 동네은행 역할을 한 셈이죠. 기사단들은 예루살렘이 쳐들어가 땅문서를 얻게 되면 그것을 템플기사단 유럽지구에 가서 식/숙박, 무기지급, 통행증 등으로 받게 되는데요.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당시 기사들은 싸워서 이기는 것이 중요했지, 땅은 그저 이겨서 받게 되는 부속물로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기사들이 죽게 되면 나중에 템플 기사단이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 없어지고, 또한 기독교 율법상 이자는 받을 수 없으니 대출상환금을 받을 수 없게 만들어 벌칙금을 부과하는 방식을 만들게 됩니다. 예를 들어, 기사단이 대출을 받아 숙박증이나 여러 들을 템플 기사단으로부터 받으면 2달안에 갚아야 하는 식이고, 이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벌칙금이 불어나는 식이죠, 화폐에 시간개념이 도입된 것 입니다


하지만, 기사단이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는 것만해도 3달이 걸리기 때문에 그 벌칙금은 불어나게 됐고 기사단이 빚이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기사단은 나중에 자신들의 명예를 버리고 돈이 있어보이는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예루살렘에 있는 유태인 이슬람인들을 모두 죽이고 돈이 되는 모든 것들을 약탈하는 사태까지 이르게 되었죠.


왕의 입장에서는 이런 템플 기사단의 행보가 탐탁치 않았지만, 템플 기사단의 세가 쎄기 때문에 직접적인 제압은 힘들었어요. 그래서 프랑스 황제 필립 4세는 1307 10 13일 유럽전역에 비밀 결사대를 조직하여 기사단을 체포하고 악으로 몰아 모두 처형했답니다


하지만, 필립 4세는 이러한 고금리 정책을 폐지 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또 악용하게 되었는데요. 기독교 율법 (신명기)에서는 형제(같은 국가)에게는 이자를 받으면 안되지만, 다른 형제 (다른나라) 에게는 받아도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점을 이용하게됩니다


그래서 필립 4세는 프랑스에 있던 유태인들에게 정상적인 일을 못하게 일자리를 규제하고, 프랑스 국가에서 보증을 서줄 테니 고리대급업을 하라고 하명하게됩니다. 이 때부터 유대인과 프랑스 왕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됩니다. 필립 4세 왕이 유태인들에게 프랑스 기사 또는 국민들의 보증을 서주게 되고, 기사들은 이자를 갚기 위해 여러 땅을 정복해 나가는 식으로 왕은 자신의 권한을 넓힐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당시 유태인들이 유럽인들에게 돈을 대출해주기도 했었는데요. 기사들이 나가서 죽게 되면 역시 이자를 못 갚게 되는데 이때 유태인들이 프랑스 국왕에게 대출이자를 갚으라고 하게 됩니다. 프랑스 국왕은 민중들에게 유태인들 때문에 삶이 피폐해지고 있다는 소문을 일으키게 하고 민중들이 봉기를 일으키게 만들면서 이러한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게 됩니다.


기사들이 이자를 갚게 하기 위한 또 하나의 방책은 왕이 기사들에게 점령할 땅들을 소개시켜 주는 것인데, 이것이 포루투갈이 대항의 시대의 포문을 열게 만드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대항의 시대와 제국주의는 빚을 갚기 위한 기사들의 처절한 움직임이었던 것이죠.






<6. 제국주의의 팽창; 은>


나라의 빚을 청산하기 위해 제국시대의 유럽열강들은 돈이 되는 모든 것들, 필수품, 사치품을 약탈 및 수입하려고 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보화)입니다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를 설립해 증권거래소와 채권거래소를 만들어 금융시장에 자율적으로 맡기게 됩니다. 그래서 중산층들이 주식이나 채권을 사들이면 그 돈이 동인도회사에 중재에 따라 함대로 가게되고, 함대는 다른 나라를 쳐들어가 물건을 약탈해 현물시장으로 넘기게 됩니다


이 현물시장에서 다시 동인도회사로 현금을 넘겨주게 되고, 다시 금융시장에 넘겨 줌으로써 다시 중산층에게 이익을 주는 방식이었죠. 당시 약탈한 물건중에서 가장 인기있었던 것이 후추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후추가 가장 큰 돈이되는 물건이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네덜란드가 후추가 많이 생산되는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삼게 됩니다


그런데 역시 이 시스템에서 또한 이자율 문제를 안고 있었어요. 당시 이자율의 최대치는 40%였는데요. 이 말은 자신이 100% 수익을 내지 못하면 파산한다는 뜻인데,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이러한 이자율을 감당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노예와 마약을 불법적으로 거래하면서 수익을 높이게 되는데, 그래서 아프리카들을 정복하고 사람들을 노예로 삼기시작합니다


그리고 영국은 마약을 국가수출품으로 만들어 수출하기 시작하게되고, 이것이 아편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죠.  






지금까지 화폐의 기원에 대해서 알아보았어요. 이러한 지식을 통해 아편전쟁이 일어난 배경에 대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다음글에서는 아편전쟁과 그 결과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할께요!





[래퍼런스]

 어쩌다 어른, 조승연 작가편, 화폐의 기원

안녕하세요! 시간여행자에요~




첫 영상에서 알 수 있듯이 홍콩과 중국은 단지 민주주의 때문에 서로 다투고 있는건 아니에요. 광둥어라는 것은 홍콩의 뿌리가 되는 언어인데 왜 이것이 북경에서 쓰이는 중국어와 다른걸까요?

이번에는 '광둥어'라는 언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살펴보면서 홍콩이라는 지역의 기원이 되는 배경에 대해서 살펴볼께요~!



<1.한족과 명나라>

대만편에서 살펴봤듯이 한족이 세원 명나라(1368~1644)가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1644~1924)에게 밀려 한족 출신들은 점점 남쪽지방으로 후퇴했어요. 대부분 한족은 푸젠성과 광둥성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사진1>



한족출신 명나라 사람들은 광둥성 지방에서 자신들만의 문화를 구축하면서 살아갔는데요. 광둥어가 그 중 하나라고 합니다~


어쩌면 홍콩시민들은 광둥어야 말로 한족의 순수성을 더 잘 보존하고 있는 언어라고 보는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됐어요. 물론 중국본토에 있는 중국시민들 또한 자신들이 조상을 한족의 뿌리로 두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홍콩시민들이 광둥어를 지키려고 하는 이유는 자신들이야말로 한족의 민족성을 잘 지키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게 됐어요.


당시 여행했을때 홍콩학생들이 사진을 찍자고해서 같이 찍었어요ㅎㅎ

이 학생들은 광둥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이번 글은 굉장히 짧았어요~ 하지만 다음 글부터는 본격적으로 영국과 홍콩의 관계를 다루는 내용이 기재될테니 많이 지켜봐주세요!


 


[사진 레퍼런스]

사진1

https://sites.google.com/site/chinese2011km/jung-gugjibang/gwangdong-gwangseo




안녕하세요~ 시간여행자에요!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 홍콩시위에 관한 뉴스들이 굉장히 많이 나오고 있어요. 왜 중국정부는 홍콩시위를 진압하려고 하는걸까요? 홍콩시민들은 왜 시위를 하고 있는걸까요?


명확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답은 '민주주의'가 아닐까해요. 홍콩시민들은 중국의 공산주의가 들어오는걸 막고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지키려고 하고 있는 중인데요.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요? 홍콩은 중국에서 관할하고 있는 지역인데 어떻게 민주주의가 꽃피게 된걸까요?


오로지 영국의 영향 때문이었을까요?


이러한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 홍콩이라는 지역이 갖고 있는 역사와 '쑨원'이라는 인물의 발자취를 따라가 볼 거에요!


그럼 홍콩의 과거로 여행을 시작하겠습니다!!






Q1. 왜 홍콩에서는 대다수 중국인들이 이해못하는 광둥어를 사용하죠? 

Q2. 영국은 왜 청나라에 아편을 판매한건가요?

Q3. 아편전쟁은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켰나요?

Q4. 홍차가 미국을 탄생시켰다구요?

Q4. 영국은 홍콩을 어떻게 지배하기 시작했나요?

- 홍콩섬

Q6. 쑨원이 누구인가요?

Q7. 홍콩의 과거와 현재는 어떤가요?


홍콩은 마카오와 함께 '해외여행' 카테고리 두 번째 방문지에요! 


위와같은 질문들을 해결해가면서 홍콩이슈들을 좀 더 깊은 관점에서 이해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요! 그럼 출발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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